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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문화산책] <20>문학(4)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원했던 시인- 한평생 학생이었던 윤동주

수치심, 죄의식의 십자가에서 피어난 불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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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이었다. 동녘이 터오기 전인 새벽 3시 36분, 윤동주는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 독방에서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한겨울인데 몸은 불덩이였다. 아!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는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바로 그 순간 숨이 멎었다. 만 29세, 이제 막 봉오리를 맺은 한 송이 꽃을 일제는 뚝 분질렀고, 화장터에서 몇 줌의 뼛가루로 만들었다. 용정의 묘지에 묻혀 있는 것은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윤동주 아버지 윤영석씨가 건네받은 유골함이다.

 필자가 윤동주의 발자취를 더듬어 중국의 명동과 용정 등지를 찾아본 것은 1999년이었다. 이때 그의 묘소를 못 보고 와서 다시 가서 보고 온 것이 2003년이었다. 두 번의 답사를 회상하면서 시인의 생애와 시 세계를 더듬어본다.



 
▲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이었다.
동녘이 터오기 전인 새벽 3시 36분, 윤동주는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 독방에서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한겨울인데 몸은 불덩이였다.
아!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는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바로 그 순간 숨이 멎었다.
만 29세, 이제 막 봉오리를 맺은 한 송이 꽃을 일제는 뚝 분질렀고, 화장터에서 몇 줌의 뼛가루로 만들었다.
용정의 묘지에 묻혀 있는 것은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윤동주 아버지 윤영석씨가 건네받은 유골함이다.
 


 
▲ 일본인 학자 오오무라 교수가 북간도 용정에서 발견한 윤동주의 묘.
 


 
▲ 윤동주가 다닌 일본 도시샤대 교정에 세워져 있는 시비 앞에 선 필자.
 
 
#한ㆍ중ㆍ일 세 나라에서 기리는 시인

 대한민국 사람치고 윤동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본의 고등학교 검인정 교과서에 1990년부터 윤동주의 `서시`가 실려 일본인들도 상당수 알고 있는 시인이다. 일본에는 윤동주 시를 연구하는 학회와 민간인 단체 수가 한국보다 많다고 한다. 오오무라 마스오 같은 일본인 학자는 우리가 중국과 수교하기 전인 1985년, 북간도 용정에 윤동주의 묘와 비문이 있음을 한국 언론계와 학계에 처음 소개했고, 「윤동주와 한국문학」 같은 책도 펴낸 바 있다. 윤동주의 성장기와 행적을 중심으로 한 연구는 중국 연길의 연변대학을 중심으로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등이 발족돼 윤동주문학상을 제정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하고 있다. 작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윤동주문학관이 세워졌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연세대학의 전신)에 다니고 있을 때 소설가 김송의 집에 하숙했는데 바로 인왕산 근처였다. 하숙한 기간은 4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별 헤는 밤`과 `자화상` 등을 썼기에 문학관과 함께 `윤동주 시인의 언덕`도 조성돼 있다.
 
 #늘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시인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아홉 살 때 명동소학교에 입학한 이래 많은 학교를 다녔다. 일본경찰에 체포될 무렵 교토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 학생이었는데 명동소학교→은진중학교→평양 숭실중학교→용정 광명학원 중학부→연희전문 문과→동경 릿쿄(立敎)대 영문과→도시샤대 영문과를 다녔으니 3개국 7개 학교를 다닌, 평생 학생이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왜 그토록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것일까.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또 태초의 아침), "쳐다보면 하늘이 부끄럽게 푸릅니다"(길),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별 헤는 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서시),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참회록),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사랑스런 추억)…. 수치심이야말로 윤동주의 가장 기본적인 심성이었다. 일본 유학시절인 1942년 6월 3일에 쓴 `쉽게 씌어진 시`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 히라누마 도오슈(平沼東柱)라고 창씨개명을 했는데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학병과 징용으로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죽어가고 있을 때 본인은 이름까지 고쳐가며 일본 유학을 가서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가고 있으니 몹시 부끄러웠을 것이다. 핍박받는



가톨릭평화신문  201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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