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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의 순교자들] <4>고트리프(요한 세례자) 아우어 수사

겸손, 성실한 수도자요 수도원 초기 역사 촬영한 기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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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트리프(요한 세례자) 아우어 (Gottlieb Auer) 수사



 
▲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 1887년 10월 25일. 독일 아이히슈테트교구 라우터호펜
 ▲세례명 : 요한 세례자
 ▲첫서원 : 1909년 10월 10일
 ▲한국파견 : 1914년 5월 3일
 ▲소임 : 건축 및 사진 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2년 4월 6일 옥사덕수용소

"좋은 수도자가 가장 훌륭한 선교사다(Bouns Monachus Optimus Missionarius)"는 교회 속담이 있다. 또 "규칙 안에 사는 것이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다"는 격언도 있다. 교회 격언대로라면 좋은 수도자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요건은 수도 규칙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이다.

 고트리프 아우어 수사는 이 격언에 딱 맞는, `규칙 안에 사는 겸손한 수도자`였다. 민종덕(閔鍾德), 의역해 풀이하면 `완덕을 위해 거듭 노력하는 자`라는 그의 한국 이름만 봐도 그 성품을 알 수 있다.

 아우어 수사는 1887년 10월 25일 독일 아이히슈테트교구 노이마크트 근처 라우터호펜에서 농부인 부친 마하엘 아우어와 모친 가타리나 아우어 슬하에 태어났다. 세례명은 요한 세례자. 그는 형제 셋, 누이 셋과 함께 성장했다. 그의 가정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늘 화목했다. 그의 학생생활기록부에는 `자질이 충분하고 매우 부지런하다`고 기록돼 있고, 본당 신부도 아우어에 대해 "조용하고 겸손한 성품에 매우 성실하고 온순하며 잘난 체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아우어는 목공 실습생으로 1906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해 1907년 10월 4일 `고트리프`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을 시작, 1909년 10월 10일 첫서원을, 1913년 종신서원을 했다. 이후 1914년 5월 3일 한국 선교사로 파견돼 5월 16일 제르마노 하르트만ㆍ바실리우스 하우저 수사와 함께 서울에 도착한 후 수도원 목공소에서 숭공학교 학생들을 가르쳤다.

 고트리프 아우어 수사는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도 전인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국 칭다오의 독일군 수비대로 징집돼 보병부대에 배속됐다. 하지만 그는 처음 몇 주를 빼고는 줄곧 야전병원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마지막 돌격 때는 그도 함께 싸웠다. "칭다오 항구는 대단히 아름답다. 할 일도 아주 많다. 일본, 영국, 러시아, 프랑스, 혹은 중국 군대가 쳐들어올까 봐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과 조국을 위해 기꺼이 싸우다 죽을 각오가 돼 있다. 나는 수도원에서 죽는 것처럼 기쁘고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고트리프 아우어 수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지만 1914년 11월 7일 칭다오가 함락된 후 파스칼리스 팡가우어ㆍ야누아리오 슈뢰더 수사와 함께 일본군 포로가 돼 1920년 1월 서울로 귀환할 때까지 6년여를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했다. 아우어 수사는 포로수용소에서도 그냥 있지 않고 같은 포로였던 건축 기술자에게서 건축 설계를 배우면서, 선교사답게 포로들을 위로하고 중환자들을 보살폈다.

 많은 독일인 수도자들과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강제 징집돼 전쟁터로 내몰리자 한국 교회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전쟁 때문에 한국 선교는 큰 손실을 보았다. 한국 신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지속할까? 이 끔찍한 전쟁 통에 우리의 선교 활동이 너무 큰 고통을 겪지 않도록 기도드린다"(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1914년 편지 중에서).

 오랜 포로 생활로 병약했던 그는 서울로 귀환한 후 패혈증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었다. 그 후 수도원 성가 반주와 함께 수도원 홍보 사진 촬영을 담당했다. 물론 목수 일과 건축 설계도 꾸준히 했다.

 1922년 4월 8일 고트리프 아우어 수사는 안드레아 에카르트 신부를 도와 원산에서 도보로 3시간 30분가량 떨어진 문평에 주민의 요청으로 학교를 지으면서 기적 같은 일을 체험한다.

 "그 마을에는 신자가 한 명도 없는 외교인 마을이었다. 수사들이 학교를 완공하는 데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6월 16일 축복식이 거행됐다.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아름다운 숲을 지나 바닷가를 따라서 옥천리까지 걸어갔다. 옥천리에 이르니 하얗게 회칠한 한옥 양식의 아담한 학교가 다정스레 방문객을 맞아 주었다.… 9개 마을에서 학생 120명이 이 학교에 다니게 된다. 상급반 학생들, 읍장을 비롯한 마을 주민 다수가 세례를 받으려고 준비하고 있다"(1922년 「원산 연대기」 중에서). 이 소박한 첫 학교는 15년 동안 제 역할을 다했다. 그 후 티모테오 비털리 신부가 고향 스위스에서 모금한 돈으로 학교와 성당을 벽돌로 재건축했다. 한국전쟁 이후로는 아무도 문평 소식을 모른다.

 덕원으로 옮긴 수도자들은 먼저 신학교 건물 공사를 시작했다. 고트리프 아우어 수사는 카예타노 피어하우스 신부와 1926년 6월부터 건축 용지를 측량했다. 이 언덕 위에 `아시아의 몬테카시노`로 불릴 만한 수도원과 성당을 세우고, 그 언덕 아래 조금 떨어진 편편한 언덕 위에 신학교를 세운다는 것이 최초의 건축 계획이었다. 1927년 11월 일단의 수사들이 수도 서울 한가운데 있던 옛 수도원을 등지고 이곳으로 옮겨 온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백동수도원이 새로운 선교 지역에서 너무 멀고, 점점 커지는 공동체에 식량을 조달하기에는 농장이 너무 작았다. 그러나 덕원으로 옮기게 된 진정한 이유는 전혀 다른 차원 즉 영성적 차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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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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