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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의 순교자들] <5>카누트 (베네딕토) 다베르나스 신부

백작 아들, 모든 것 하느님께 바친 열정적 사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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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
(Canut Graf des Enffans d`Avernas)



 
▲ 그림=김형주(이멜다)
 

 
 ▲출생 : 1884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쉬름도르프
 ▲세례명 : 베네딕토
 ▲첫서원 : 1912년 7월 28일
 ▲사제수품 : 1914년 8월 13일
 ▲종신서원 : 1915년 8월 27일
 ▲한국 파견 : 1921년 1월 16일
 ▲소임 : 원산대목구 내평ㆍ고산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50년 11월 6일, 만포수용소


"누가 백작 아들의 그런 최후를 예상했겠습니까? 그보다 먼저 간 여섯 분 중 누구도 그렇게 참혹하게 죽지는 않았습니다."

 "수도생활 내내 가난을 사랑하셨던 카누트 신부님은 죽을 때도 온전히 가난하게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 시신은 대충 자루에 싸여 한국인 피랍자들이 들고 갔습니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의 임종을 지켜본 제르트루다 링크ㆍ디오메데스 메페르트ㆍ아르사시아 아이그너 수녀들의 증언이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1884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그라츠-세카우 교구 쉬름도르프에서 태어났다. 쉬름도르프는 현재 슬로베니아 무르스카 소보타 교구 아프체이다. 그의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2세로부터 1805년 작위를 받은 하인리히 엉팡 다베르나스 백작이고, 어머니는 안나 플라이다. 세례명은 베네딕토, 한국명은 나국재(羅國宰)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자기 재산을 버리지 못해 예수의 제자가 되길 포기했지만 카누트 다베르나스는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거적 한 장에 싸여 묻힌 그리스도의 참 제자다.



 
▲ 고산성당에서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와 전교회장이 사목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 1932년 덕원 신학교 축제 때 악단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다베르나스 신부(오른쪽 두 번째).
 
 
 #삼형제 신부

 그는 티롤 황제 사냥대 소위로 인스부르크대학 법학과 3학기를 다니던 1906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 청원서를 냈다. 그리고 내적으로 수도생활을 잘 준비했던 펠트키르크의 군 생활을 마치고 1911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청원기를 거쳐 덴마크 임금으로 성인품에 오른 `카누트`를 수도명으로 받고 수련기를 시작, 1912년 7월 28일 유기서원을 했다. 이어 뮌헨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마친 후 1914년 8월 1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듬해 1915년 8월 27일에 종신서원을 한 후 1921년 1월 16일 한국 선교사로 파견됐다.

 카누트 신부의 두 형제도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었다. 형 레오폴드 다베르나스 신부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회 소속으로 그보다 먼저 한국에 와 덕원수도원 부원장 겸 덕원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다 1944년 12월 20일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또 그의 동생 하인리히 다베르나스 신부는 세카우 수도원에 입회해 1952년 브라질의 한 보이론 연합회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영하 30℃에도 난방 안 되는 사제관에서

 1921년 4월 9일 빈첸시오 슈스터ㆍ마르코 바잉거 신부와 함께 서울에 도착한 다베르나스 신부는 한국말을 채 배우기도 전인 그해 6월 13일 압록강 건너 간도 지역 한국인 본당을 인수하러 가는 선발팀에 소속돼 연길로 갔다. 그는 이질에 걸려 1923년 봄 서울 수도원으로 후송되기 전까지 삼원봉과 팔도구 성당에서 사목했다. 그는 영하 30℃가 넘는 날씨에도 난방이 안 되는 사제관과 창호지가 찢어지고 무너질 듯한 삼원봉성당에서 1921년 겨울을 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새벽 미사부터 밤 10시까지 고해소에서 고해성사를 줄 만큼 열정적으로 사목했다.

 "미사 중에 성작 속의 얼음을 세 번이나 녹여야 했습니다. 위만 살짝 언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작 밑바닥까지 꽁꽁 얼었습니다. 미사 경본대 옆에 있는 촛불로 얼음은 쉽게 녹였지만, 미사의 경건함은 반감됐습니다. 손가락이 얼얼해 미사 내내 신경이 쓰였습니다"(다베르나스 신부 보고서 중에서).

 수도원에서 건강을 회복한 다베르나스 신부는 1923년 10월 내평 선교기지 책임자로 부임했다. 1930년 그는 옹색하고 외딴 마을에 신자라고는



가톨릭평화신문  201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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