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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의 순교자들] <6>장 아녜타 헌신자`

몸과 마음 오롯이 수도자의 삶 산 ''첫 한국인 봉헌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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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녜타 헌신자


 
 ▲출생 : 1910년 황해도
 ▲세례명 : 아가타
 ▲수녀원 헌신 입회 : 1926년 4월 1일
 ▲종신 헌신 : 1927년 2월 26일. 원산수녀원
 ▲소임 : 원산 수녀원 안내실
 ▲체포 일자 및 장소 : 1950년 6월 25일. 함흥 유 안셀모 어머니 가옥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10월 14일. 함흥 인민교화소

수녀로서 살았지만 수녀가 쓰는 머릿수건은 평생 써보지 못했다. 그게 멍에였다. 그러나 그 멍에를 쓰고서도 하느님의 사명을 충실히 실천했다. 작지만 숭고하고 영웅적인 삶이었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첫 한국인 봉헌회원인 장 아녜타 헌신자의 삶이다.
 
 # 수녀 꿈 접고 부모 약속으로 혼인

 장 아녜타 헌신자는 1910년 황해도 매화리 본당 장상범(야고보) 회장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세례명 그대로 호적에 올려 이름도 `아가타`로 불렸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특별한 신앙심을 본받고 성장했다. 아버지는 가난한 이들과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구제하는 일에 항상 앞장섰다.

 장 아녜타 헌신자는 어렸을 때부터 늘 수녀가 되고 싶었지만, 소망대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열여섯에 혼인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서로 성(性)이 다를 때 사돈을 맺자는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의 혼약에 따라 폐결핵으로 죽음이 임박한 약혼자와 혼례식을 올렸다. "결혼 못한 남자가 죽으면 몽달귀신이 된다"는 미신 때문에 억지춘향격으로 치러진 혼례였다. 병이 깊었던 남편은 결혼 1주일 남짓 후에 임종했다.
 
 # `헌신자`로 입회

 아녜타는 1926년 4월 1일 18살에 원산수녀원 첫 입회자 3명과 함께 `헌신자`로 입회했다. 교회법은 배우자가 사망해 혼인이 해소된 경우 합법적으로 수도회에 입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지만, 보수적인 관습 탓에 `수녀`로서가 아닌 `평신도 봉헌회원`으로 입회하게 된 것. 함께 입회한 3명은 1년 후인 1927년 2월 26일 청원자가 쓰는 `머릿수건`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받지 못했다. 하지만 원산 수녀원 초대 원장 마틸데 히르슈 수녀는 아녜타의 됨됨이를 보고 "수녀원 안에 종신토록 머물러 살 것"을 허락하고,`아녜타`라는 수도명으로 그녀에게 `종신 헌신자` 서원을 베풀었다. 툿찡의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한국인 봉헌회원 첫 열매가 된 것이다.
 
 # 수도서원 못하는 것 평생 아픔으로 남아

 그러나 장 아녜타는 자신이 그토록 흠모했던 수도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이 되지 못한 것에 크게 실망했고, 그것은 그녀의 평생 아픔이 됐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늘 사람들에게 자신도 `동정녀`라는 것을 강조했다. 원산 공동체 수녀들 모두와 신자들도 그녀의 상심을 헤아렸는지 항상 그녀에게 "아녜타 수녀님"이라고 불렀다.

 "아녜타 수녀님은 한 삶을 정식으로 종신서원을 한 수녀가 되지 못하고 늘 청원자 복장을 하고 사는 것을 가슴 아파했고, 특히 수녀원의 종신서원식이 있을 때마다 더욱 어려워했었다.…하지만 장 아녜타 수녀님은 그럴 때도 오직 묵묵히 기도하며 `자신은 온전히 동정이며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종신서원을 한 수녀`라는 긍지를 가지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것을 다짐했었다"(무로 후미코 막달레나 수녀 증언 중에서).
 
 # 옷을 하도 기워 입어 원래 색깔 식별 못할 정도

 장 아녜타 헌신자는 수녀원 안에 살면서 궂은일을 앞장서 했다. 그녀가 수녀원에서 가장 오랜 기간 맡아 한 일은 안내실 소임이었고, 원산 본당에서 선교활동도 했다. "사람들이 무엇을 지시하고 부탁하건, 그녀는 헌신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또한, 나이 든 남자들에게 교리문답과 주요 기도문을 가르치는 데 각별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또 수녀들이 병이 나서 밤에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할 때면, 그녀는 언제나 기꺼이 도움을 자청했다. 그녀는 모든 이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의 미소를 잊지 않았다"(마리아 요하네스 마짜난 수녀 증언 중에서).

 장 아녜타는 아버지의 성품을 빼닮아 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원장 수녀에게 알렸고, 그들을 위해 음식과 물건을 갖춰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선 아주 엄격하고 검소했다. "자신의 생필품은 정말 보잘것없었다. 옷도 하도 기워 입어서, 원래 색깔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였다"(마리아 요하네스 마짜난 수녀 증언 중에서).


 
▲ 툿찡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 수녀들이 1926년부터 원산 해성학교 운동장 옆 초가에서 가난한 집의 여자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이것이 원산 호수천신학교의 시작이다.
1927년 원산 수녀원이 새로 지어지자 옛 수녀원에 새로운 교실을 마련, 여자 아이들을 가르쳤다.
사진은 1930년 호수천신학교의 한 교실에서 장 아녜타(뒷줄 오른쪽) 헌신자가 크리소스토마 슈미트 수녀와 함께 여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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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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