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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의 순교자들] <7>최병권 마티아 신부

병마의 그늘에도 성실 명민했던 함흥교구 첫 한국인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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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권(마티아) 신부
 

 
 ▲출생:1908년 3월 3일. 함남 안변
 ▲세례명 : 마티아
 ▲사제수품 : 1938년 4월 2일
 ▲소임 : 평양 대목구 서포본당 주임 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영성지도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49년 ? , 평양인민교화소 ?


최병권(마티아) 신부는 덕원 함흥교구 소속 사제다. 그는 1908년 3월 3일 함경남도 안변에서 태어났다. 내평본당 공소인 안변에는 네 가구만 가톨릭 신자였고 모두 `체`를 만들어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다.

 최병권 신부는 1921년 11월 1일 성 베네딕도회 서울 수도원이 백동 소신학교 개교와 함께 첫 신입생으로 받은 15명 중 한 명으로 예비과 공부를 시작했다.

 "오늘 내평의 세바스티아노 슈넬 신부가 자신이 돌보는 어린 소년을 데리고 왔다. 본당 신부는 기차로 7시간 걸리는 먼 여행길을 자신의 첫 소신학생과 동행하고 싶었던 것이다. 모쪼록 이 소년이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1921년 10월 25일자 「백동 연대기」 중에서)

 #피를 토할 만큼 증세 심해

 서울 수도원 수도자들의 희망대로 그는 유일하게 간도 지역 이외 출신으로 1930년 6월 28일 소신학교 첫 졸업생이 됐다. 이어 그는 대구 성 유스티노 대신학교에 입학했으나 1931년 9월 폐병(결핵)을 심하게 앓아 학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수도원 병실에서 간호 수사가 벌써 몇 주째 사랑으로 정성껏 보살피고 있다. 그러나 병세가 쉽게 호전되지 않아, 그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1931년 9월 「덕원 연대기」 중에서).

 피를 토할 만큼 증세가 심해 그는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2년간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다행히 건강이 호전돼 신학교에 복학했지만 공부에 무리해 결핵이 재발, 1935년 6월 차부제품을 앞두고 다시 휴학하고 요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는 5년 전에도 피를 토해 2년간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너끈히 건강을 회복해 3년간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고 여겼는데, 이번 일을 겪고 보니 실은 그렇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최 마티아는 2년 안에 우리 원산 대목구 출신의 첫 사제가 될 사람이라 이번 불운은 더욱 애석하다"(1936년 「덕원 연대기」 중에서).

 #완치 판정 받고 사제품 받아
 덕원 수도원은 성실하고 명민한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그를 수도원에서 2년간 요양하도록 했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1937년 겨울, 원산의 한 일본인 의사와 독일인 의사인 디오메데스 메펠트 수녀에게 그의 폐를 꼼꼼히 진찰하게 한 후 완치 판정을 받자, 덕원 수도원에서 11월 23일 차부제품을, 12월 8일 부제품을 연이어 그에게 줬다.

 1938년 3월 21일(성 베네딕토 선종 축일)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원산 대목구 출신 한국인 첫 사제서품식을 거행했다. 최병권 부제는 이날 임화길(안드레아)ㆍ김보용(루도비코) 부제와 함께 사제품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심한 감기로 서품식에 참례할 수 없었다. 열흘이 지난 후 건강을 회복한 그는 4월 2일 사우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비록 건강 문제로 사제품을 며칠 늦게 받았지만, 그는 덕원 함흥교구 소속 최초의 한국인 신부들 가운데 한 명이다.

 사제품을 받은 후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던 최병권 신부는 덕원 수도원에 머물며 번역 활동을 하면서 독일인 수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고 주일에는 덕원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도왔다. 그는 또 덕원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했다. 그 후 최 신부는 1944년 11월부터 1947년 10월까지 평양 서포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영성지도 신부로 활동했고, 곧이어 잠깐 서포본당 주임신부를 맡아 서 사목하다 결핵이 재발해 덕원 수도원으로 복귀한 후 덕원 신학교에서 교회사 교수로 일했다. "최 마티아 신부는 재능이 출중한 사람입니다. 교회사 강의를 아주 멋지게 준비했는데 이는 독일어 실력이 크게 향상된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는 환자입니다. 매일 미사를 집전하고 일도 조금 할 수 있지만 온종일 누워서 보내는 날도 더러 있습니다"(1947~1948년 「덕원 연대기」 중에서).


 
▲ 신학생 시절의 최병권 마티아 신부.
이 사진은 1929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지에 실렸다.
 



가톨릭평화신문  201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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