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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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문화산책] <32>성음악(7) 교회의 분리와 교회음악의 분리

신교는 대중적 ''코랄'' 발전, 가톨릭은 전통 전례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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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첫 음악가인 요한 발터의 코랄의 한 예.
이때까지는 네 성부를 대보표에 적을 줄 몰라 따로따로 네 장으로 만들었다.
주 선율은 테너가 부른다.
 


 
▲ 세례자 성 요한 수녀회원들이 지난해 9월 미국 일리노이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성당에서 풀턴 쉰 대주교(1895~1979)가경자 선포를 기념해 봉헌된 미사 중 입당 성가를 부르고 있다. 【CNS】
 
 
   교회사에서 가장 큰 비극을 꼽는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16세기 교회 분리를 든다.

 하지만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비극을 통해서도 좋은 결과를 창조해 주셨다. 교회는 분리를 통해 다시 자신을 내적으로 정비하고 또 풍성하게까지 했던 것이다.

 1516년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저항으로 시작된 교회 분리는 스위스에서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와 그의 뒤를 이은 장 칼뱅(1509~1564)에 의해 보강됐다. 저항은 중앙집권적 신성로마제국에서 벗어나려는 지방 영주들의 지원을 받으며 급속히 세력을 형성했다. 결국에는 가톨릭교회를 옹호하는 황제 칼 5세와 이에 항거하는 지방 영주들이 교회분리파를 옹호하며 결성한 슈말칼텐 동맹세력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복잡한 정치적 술수들이 얽히며 전쟁이 끝나고 아우크스부르크협약에 따라 영주의 신앙에 따라 해당 영지의 신앙이 결정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백성들은 자신의 신앙에 따라 다른 영지로 이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협약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1618년에서 1648년 사이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종내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각자 신앙이 보장되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다. 중앙집권제가 지방분권제로 변화되는 전환점에 교회 분리 운동이 큰 에너지를 공급한 셈이다.

 프로테스탄트, 전례와 성음악 변화

 이렇게 교회를 분리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쪽에서는 신자들이 가톨릭교회에 대한 향수를 털어내기 위해 당면 과제가 있었다. 바로 전례와 성음악이었다. 처음으로 손을 댄 건 라틴어 사용을 금지하고 자신들의 언어인 독일어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이었다. 라틴어가 이미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낯선 언어가 돼버린 당시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은 대단히 충격적이었고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거기에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이때까지 가톨릭교회는 라틴어 성경만을 고집했고, 이는 성경을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전용물로 만들었다.

 또한 루터는 `코랄(Choral)`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쉽고 대중적인 성가 형식을 고안해 냈다. 평신도들이 쉽게 배우는 성가 가사에 새로운 교리를 이식해 부르도록 한 운동은 커다란 효과를 거뒀다. 코랄은 또 지금까지 그레고리오 성가가 모든 음악의 소재가 됐던 역할을 대신해 독일 교회음악의 소재가 됐다.

 루터는 성음악에 관심이 깊은 사제였다. 현악기인 류트(Lute)와 최고 음역의관악기인 플루트(Flute) 연주를 즐겼고, 테너를 맡아 노래하기도 했으며, 조스깽 데 프레(1440~1521)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코랄을 개척하면서 자신도 몇 곡을 직접 지었는데,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깊은 고난에서(Aus tiefer Not)`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결국은 전문 음악가들의 도움이 절실했는데, 이 대목에서 요한 발터(1496~1570)가 등장한다. 처음부터 루터와 함께 활동한 발터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첫 음악가다. 이는 당시 유럽 내에서 음악이 가장 빈곤했던 독일을 음악의 나라로 세우는 첫걸음이었다. 물론 그 전에 하인리히 이사악(1450께~1517)이나 오를란도 디 랏소(1532~1594) 같은 독일 출신 음악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플라망 악파의 음악가들이며 주로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했기에 독일의 음악전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발터는 1524년에 「작은 성가책(Geystliches gesangk Buchleyn)」을 출판했고, 1526년에는 「독일 미사곡(Deutsche Messe)」을 발간했다.

 발터를 잇는 프로테스탄트 음악가로는 속칭 `3S`로 불리는 하인리히 쉬츠(1585~1672)와 헤르만 샤인(1586~1630), 하인리히 샤이데만(1596~1663) 등을 꼽을 수 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에 이르러서는 교회음악 분야에서뿐 아니라 세속음악에서도 유럽 음악을 선도하기 시작한다.

 또한 영국 왕 헨리 8세는 1554년 자신의 이혼과 재혼을 허락하지 않는 교황청에 항거해 영국국교회(성공회)를 세웠다. 그러고나서는 독일 프로테스탄트와 같은 고민 속에서 영어를 전례에 도입하고 영어를 가사로 하는 전례음악을 발전시켰다. 초기 기초를 닦은 음악가로 토마스 탈리스(1505~1585), 윌리엄 버드(1543~1623)를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겉으로는 국교회를 위한 음악가로서 활동하면서도 속으로는 가톨릭신앙을 지켰다. 영국국교회 역시 자신들의 독창적 음악을 마련하는데, 가톨릭교회의 모테트에 대응하는 앤섬(Anthem) 형식이 그것이다. 또 전례도 미사에서 변형된 예배(Service)를 고안했는데, 이는 미사와 시간전례(성무일도)를 적당히 섞은 형태였다.

 가톨릭, 라틴어 전례와 음악 그대로

 반면 가톨릭교회는 교회 분리의 충격에서 벗어나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를 개최하는데, 여기서는 교리와 교회개혁뿐 아니라 전례와 전례음악에 대한 정비도 뒤따랐다. 이 공의회에 따라 전례 흐름과 잘 어울리며 가사 전달이 잘 되는 음악, 곧 팔레스트리나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악파



가톨릭평화신문  201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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