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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의 순교자들]<24>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신앙 선조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 끝까지 양떼 지킨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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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출생 : 1922년 서울 이화동
 ▲세례명 : 가브리엘
 ▲소속 : 함흥교구
 ▲사제수품 : 1940년 3월 25일
 ▲소임 : 덕원신학교 사감, 흥남본당 주임, 회령ㆍ계림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원산 수녀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6월 25일 이후 행불, 평양인민교화소



 
▲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에게 사제품을 받고 있는 구대준 신부.
 


 
▲ 구대준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후 어머니에게 첫 축복을 하고 있다.
 


 
▲ 덕원신학교 신학생 시절 소품을 받고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구대준 신부(맨 왼쪽).
소품(小品)은 오늘날 독서직이나 시종직에 해당하는 품이다.
 

"이 피정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1949년 5월 10일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도원에서 한국 수녀들의 연례 피정을 지도하던 구대준(가브리엘, 회령본당 주임) 신부는 박해를 암시하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그날 밤 수녀들과 함께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된 구 신부는 자신의 선조가 걸었던 순교의 길에 동참했다.

 함흥교구 소속인 구대준 신부는 1912년 4월 27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구종진(프란치스코)은 한말 궁내부 주사로 관직에 있다가 1905년 경술국치 이후 순사교습소 한문 교관을 지냈다. 그는 한국인 첫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 순교자의 후손 이정자(마리아)와 결혼하면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구 신부는 3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형 `원준`은 일본 유학 중 1923년 발생한 간토대지진 때 희생됐고, 동생 상준(요한 세례자)은 바로 저명한 구상 시인이다.

 한국인 첫 덕원신학교 사감 신부

 구 신부는 14살 때 어의동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26년 사제가 되기 위해 베네딕도회가 설립한 백동 소신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신학교가 덕원으로 옮겨감에 따라 덕원신학교에서 수학했다.
 마침 관직에서 물러난 아버지는 덕원수도원에서 교육사업을 도와달라는 청을 받았다. 아버지는 아들 뒷바라지도 할 겸 가산을 정리해 온 가족과 더불어 덕원수도원 아랫마을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수도원 인근의 문평, 옥평 등지에 해성학원을 설립해 원장으로 육영사업에 힘썼다.

 구 신부는 과묵하고 생각이 깊어 철학과 신학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여러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문학에 뛰어났고 덕성이 깊어 수도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1940년 3월 25일 덕원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주례로 이재철(베드로) 신부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후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덕원신학교 사감 신부로 임명됐다. 그는 신학생들에게 자율적이면서도 책임을 다하는 생활을 하도록 지도했다.

 구 신부는 1943년 4월 칼리스토 히머 신부 후임으로 제2대 흥남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다. 당시 흥남본당 신자들은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가난한 이주민들이었고, 대부분 질소비료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구 신부는 객지에서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벗이 돼 주었다. 매일 밤이 깊도록 성당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온종일 신자들에게 시달리면서도 강론 준비를 철저히 해 주일마다 신



가톨릭평화신문  201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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