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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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데 산티아고(5)-아! 여정의 끝에는 또 다른 길이…

박현주(엘리사벳,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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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연 없는 세월은 없으며 갈망 없이 숨쉬는 존재도 없다. 모든 간절한 염원에는 숭고함이 있으며 사소한 모든 것도 의미가 된다.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이야기를 지니고 있었다. 3년 전 남편이 순례 중에 길에서 세상을 떠나 매년 이 길을 걷는다는 아주머니, 산티아고 순례가 4번째라는 아저씨, 새로운 삶에 대한 각오를 다지려고 길에 오른 언니, 그리고 아직 다 이야기를 듣지 못한 사람들…. 다들 밤새 풀어내도 다 풀어내지 못할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 큰 향로에서 향이 피어오르는 순례자 미사
 

 # 피곤에 지쳐 곪아 떨어지는 것도 축복

 하루 6시간 이상씩 40여일 되는 여정을 걷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안에 내재된 힘을 느꼈다. 그것은 `갈망`이었다. 그것은 내면 깊숙이 간직된, 어쩌면 빚어 만드신 분의 숨결이 아닐까 생각했다. 누구나 다 무엇인가를 목마르게 찾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토록 목마른지 정확히 알지 못할 뿐이다.

 돌 하나를 집어들고 올라가 거대한 돌무더기에 내려놓는 손길을 보았다. 성당에 들어가 초 하나 밝히고 무릎을 꿇는 사람들도 보았다. 한발 한발 내딛는 걸음과 땀방울 하나 하나가 `지향`처럼 느껴지는 순례자도 만났다. 그 모든 간절한 염원은 숭고했다. 그 간절함 중에 어느 것 하나 선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

 산티아고 순례는 매일 일어나 걷고, 먹고, 자는 단순한 일상의 연속이다. 그러나 어느날도 같은 날이 없었다. 걷는 것이 매일 새롭고 감사했다. 먹는 것도 당연함이 아닌 은혜 그 자체였다. 밤이 되면 피곤에 지쳐 곯아떨어지는 게 얼마나 큰 쉼의 기회인지도 느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어떤 답을 구했는지 모르겠다. 설령 답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한 가지 확실하게 얻은 깨달음은 더 이상 답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길은 삶에서 다가오는 모든 것을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길에서 그분을 진하게 만났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상황에 늘 함께 하신 분, 어려움을 이겨내고 인내할 힘을 주신 분, 나의 내재된 긍정성을 알고 계신 분. 그분을 만나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간다.

 
▲ 사도 야고버(산티아고) 무덤이 발견된 지점에 세워진 산티아고 대서당.
1078년 건축을 시작해 1128년 미완성 상태로 봉헌식을 가진 성당으로, 중세시대부터 로마와 예루살렘과 함께
 
 
   # 가장 거룩한 나의 산티아고는?

 목적지 산티아고에 들어설 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그동안 지나온 풍경과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코끝만 찡해졌을 뿐이다. 어려웠던 시간들, 아름다운 기억들, 가슴 깊이 간직한 아름다움이 모여서 산티아고가 됐다.

 산티아고는 800㎞를 걸어 도착한 그곳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곳을 향해 걸었던 모든 길이 산티아고였으며, 콤포스텔라(별이 빛나는 들판)였다. 그리고 이제 돌아갈 삶의 자리가 가장 거룩한 나의 산티아고다. 여정을 마치고 산티아고 대성당에 들어가 야고보 성인상에 이마를 갖다댔다. 아니,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기라도 하듯 쿵 부딪쳤다.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나를 성장시켜준 또다른 야고보 성인이었음을 알았다.

 정오에 봉헌되는 산티아고 대성당 순례자 미사에 참례했다. 어른 키 정도 되는 거대한 향로(香爐)에서 향이 피어올랐다. 순례자들을 향한 축복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순례자들의 가슴에 작은 축제를 열어주는 것 같았다.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던 길 위의 친구들을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났으며, 고마움을 한껏 표하지 못했던 고마운 마음들도 다시 만났다. 우리는 결국 한 곳에서 만났다. 한 곳을 향해서인가?

 길을 걷는 동안 산티아고가 서쪽에 있는 것에 감사했다. 뜨거운 태양을 등지고 걸었기에 망정이지 마주하고 걸었다면 벌써 녹아버렸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 그림자를 보면서 걷는 것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내 그림자를 그토록 오래 마주할까? 내 삶의 소리 없는 동반자인 그림자에게 묻기도 하고 듣기도 한 여정이었다.

 두 시간을 기다려 순례증명서를 받았다. 졸업장을 받은 것 처럼 기뻤다. 단순히 끝남을 확인해서 기쁘기보다는 무엇인가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감사했다. 이번 순례는 나를 끌어준 무언의 손길이 함께 이룬 것이다. 단순히 걷고자 하는 의지만으로는 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끌어 주고픈 분의 의지만으로도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순례는 하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과 이끌어 주시는 분의 마음이 합쳐져 이뤄지는 작품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불러주시는 삶의 몫이 있다. 그 몫을 이루고자 또한 올바로 걷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 즉 기꺼이 기쁘게 드리는 응답이 있기에 삶의 몫이 이뤄진다. 부름과 응답의 합일점을 찾는다면 그 자리가 고되고 거칠어도 걸을 수 있다. 나는 이 길 위로 불려졌다고 믿는다. 그 분의 부르심에 기쁘게, 기꺼이 응답했다. 이것이 은총아닐까?

    #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 "한국에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순례를 권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물론 권하고 싶다. 기대는 미리 챙기



가톨릭평화신문  200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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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장 3절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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