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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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2) 윤지충 바오로(1759-1791년)

천주께 죄 지을 수 없다...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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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 예절로 장례를 치른 것을 안 종친들이 크게 화를 내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너는 신주(神主)를 그대로 묻었느냐, 아니면 불살라서 묻었느냐.(전라 감사)
 "불살라서 묻었습니다."(윤지충)
 △네가 그것을 부모처럼 공경했다면, 땅에 묻는 것은 혹 그렇다 치더라도 어찌 불사를 수 있단 말이냐.
 "제가 그것을 부모처럼 공경했다면 어떻게 그것을 불사를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신주에는 제 부모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알기 때문에 불사른 것입니다. 그것을 땅에 묻던 불사르던 먼지로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매를 맞아 죽어도 천주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네 부모나 임금님이 너를 재촉한다면 그 말씀을 따르겠느냐.
 "……"
 △너는 부모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는 놈이다.
 "저는 부모님도 임금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이 옥중에서 쓴 「죄인지충일기」(罪人持忠日記)에 나오는 내용으로,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은 죄목으로 1791년 10월 전주에 있는 전라 감영으로 잡혀온 윤지충이 전라 감사에게 문초를 당하는 대목이다. 「정조실록」(권33, 정조 15년)에 기록된 윤지충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사대부 집안에서 신주를 세우는 것이나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올리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서민들이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을 나라에서 엄하게 금지하는 일이 없고, 곤궁한 선비가 제향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엄하게 막는 예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주를 세우지 않고 제향도 차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단지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으로 나라의 금법을 범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윤지충의 폐제분주(廢祭焚主)는 유교가 지배하던 당시 사회체제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유교에서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상례(喪禮)를 거부한 것은 전통과 질서에 대한 반역이자 양반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에 대한 저항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받아들인 조정은 천주교 신자들을 사회 반동세력으로 몰아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윤지충은 한국교회 첫 번째 순교자가 된다.

 윤지충은 자신의 행위가 문제가 될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윤지충은 왜 목숨을 걸고 이 같은 일을 벌였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사에 관한 당시 교회 입장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16세기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여러 수도회 가운데 예수회는 중국 유교문화에 수용적 태도를 취하면서 조상제사를 조상에게 효를 다하는 미풍양속으로 간주했다. 반면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조상제사를 미신행위로 여겼다.

 선교회 간 견해 차이로 100여 년간 지속되던 제사논쟁은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와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 교황령으로 일단락됐다. 두 교황은 조상제사를 미신행위로 보고 엄하게 금했다. 따라서 신자들은 제사에 참례하거나 신주 또는 신위(神位)라고 써붙인 위패를 집안에 둘 수 없었다. 시신에 절하는 것 역시 금지됐다.

 교황의 이런 가르침은 1790년 북경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유교를 숭상하던 당시 조선사회에서 제사를 금한다는 천주교 가르침은 일반인들은 물론 천주교에 갓 입교한 신자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천주교를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굳은 신앙을 가졌던 윤지충은 그럴 수 없었다. 순교의 칼날을 자초한 것이다.
 
 윤지충은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살던 명문 양반가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6대조가 윤선도(尹善道)이며, 윤두서(尹斗緖)가 증조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품행이 단정했던 윤지충은 과거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정진한 끝에 1783년 봄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1784년 겨울 서울로 올라온 윤지충은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당시 천주교인들이 자주 모이던 명례방 김범우 집을 찾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천주교 서적을 빌려 연구와 묵상을 거듭하다가 1786년 정약전에게 기본교리를 배운 뒤 이듬해 정약전을 대부로 친척인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온 윤지충은 어머니와 동생 지헌(持憲)은 물론 자신의 명성을 듣고 각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윤지충은 또 이웃에 살던 외사촌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1751~1791, 하느님의 종 125위에 포함)에게도 자신이 읽던 천주교 서적을 빌려주고, 신앙에 눈뜨게 했다. 권상연은 윤지충에게 세례를 받았다.

 1790년 윤유일이 중국 북경에서 가져온 구베아(Gouvea) 주교 사목서한에 조상제사 금지 조항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윤지충은 교회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그 재를 집 뜰에 묻었다. 신주를 넣었던 빈 궤(櫃)만 사당에 세워 놓았다.

 1791년 음력 5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윤지충은 장례절차를 고민하다 상주로서 예의를 갖춰 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어머니 위패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으며, 음식도 차리지 않았다. 권상연도 그의 결정에 따랐다.

 윤지충의 제사폐지 행위를 목격한 친척과 친구들은 그를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 비난했고, 이 사건은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조정은 진산 군수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고, 체포령 소식을 들은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했다. 진산 군수가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자 두 사람은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1791년 10월 중순께였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여러 차례 설득과 회유에도 그들이 태도를 바꾸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전주 감영으로 이송했다.
 전주 감영에서 전라 감사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부모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은 짐승보다 못한 짓이라고 꾸짖고, 이는 국가에 대항하는 행위라고 추궁했다.

그러나 윤지충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증거했다. 화가 난 전라 감사는 혹독한 형벌을 가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정조 임금은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대신들 뜻을 받아들여 이들의 처형을 허락했다. 전라 감사는 당시 윤지충을 이렇게 묘사했다.

 "형문을 당할 때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가톨릭평화신문  201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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