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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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3) 주문모 야고보 신부 편

나는 조선에 야소교(耶蘇敎)를 전하러 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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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주 변문의 동지섣달 삭풍(朔風)은 살을 에어낼 듯이 매서웠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청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마을이라 사신과 상인들 왕래가 잦지만 엄동설한에는 인적이 뜸했다. 얼어붙은 강 위에 쌓인 눈만이 북풍에 어지러이 흩날렸다.

 변발을 한 청나라 사람 한 명이 총총걸음으로 강을 건너오는 게 보였다. 그는 불안한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강을 건넜다. 둔치에 몸을 숨기고 있던 지황(사바)과 윤유일(바오로)이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주문모 신부님이십니까?"
 "그렇소. 당신들이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오?"
 "예, 그렇습니다. 조선의 교우들이 신부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1794년 12월 초순, 성사집행권을 가진 신부가 마침내 조선 땅에 발을 들여 놓았다. 중국 북경교구 구베아(Gouvea) 주교가 파견한 주 신부는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성직자요, 선교사였다.


 
▲ 1) 지황과 윤유일이 의주 변문에서 만난 주문모 신부를 나귀에 태워 한양으로 향하고 있다.
주 신부는 역부(驛夫)로 가장하고 한양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한국에 발을 디딘 첫 선교사

 중국에서 들여온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깨우친 양반 계층 신자들은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중에 한 가지 실수를 범했다. 이승훈 등 10여 명이 스스로 신부가 되어 미사와 고해성사 등을 집전(가성직제도)한 것이다. 그들은 미사와 성사는 신품성사를 받은 성직자만이 거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교리를 연구해가면서 자신들 행동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챘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해 구베아 주교에게 문의했다. 구 주교는 조선에 기적적으로 교회가 탄생한 사실에 경탄하면서 선교사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북경에는 유럽인 선교사 5명이 있었지만, 조선에서 천주교 탄압 사건이 있었던 데다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어 서양인이 잠입해 활동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구 주교는 조선인들과 외모가 비슷한 마카오 출신의 중국인 오요한 신부를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오 신부는 국경에서 조선 신자들과 접촉하는 데 실패하고 얼마 뒤 사망했다.

 구 주교는 "조선 신도들은 신앙은 견고하지만 책이 부족하고, 경험이 없기 때문에 교리에 관한 지식이 피상적이다"(「구베아 일기」 참조)며 하루라도 빨리 성직자를 조선에 들여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조상제사와 신품성사 등에 대한 교회 전통과 가르침에 무지한 것을 알고, 조선교회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수년 내에 이단(異端)이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구 주교는 30대 후반에 신품성사를 받은 북경신학교 출신 주문모 신부를 다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다. 주 신부는 20여 일을 걸어 1794년 3월 변문에 도착했으나 압록강물이 풀린 데다 수비가 삼엄해 잠입이 어려웠다. 그래서 10개월 동안 만주교회를 순회하면서 겨울이 되기를 기다린 끝에 12월 의주를 통해 입국할 수 있었다.

 주 신부는 역부(驛夫)로 가장하고 열이틀을 걸어 한양에 도착, 계동에 있는 역관(譯官) 최인길(마티아) 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의 조선 입국 사실은 북경교구는 물론 조선교회에서도 몇몇 사람만 알고 있었다. 성직자 영입에 성공했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신자들은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신자들은 그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환영하고 공경했다.(「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197쪽)

 주 신부는 최인길의 집에 숨어 조선말을 배우며 선교활동에 착수했다. 부활대축일 직전 성목요일에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필담(筆談)을 통해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주 신부 입국 사실을 쉬쉬했는데도, 어떻게 소식을 접했는지 많은 신자들이 그를 만나러 찾아왔다.

#은신 중 한글 고해지침서 저술

 입국 6개월 만인 6월, 결국 일이 벌어졌다. 갓 입교한 신자인 진사(進士) 한영익이 주 신부를 만난 후 그 사실을 이벽의 동생 이석에게 밀고했다. 그 밀고는 조정에까지 닿았다. 국왕 정조는 즉각 체포령을 내렸다. 다행히 신자들이 그 낌새를 눈치 채고 주 신부를 급히 피신시켰다. 대신 중국어에 능통한 역관 최인길이 주 신부로 가장하고 집에서 관헌들을 맞았다. 하지만 최인길이 신부가 아니라는 게 금방 들통났다. 그 바람에 주 신부 영입에 앞장선 최인길, 윤유일, 지황 3명이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다 죽임을 당했다.

 주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 3명이 목숨을 잃은 것을 몹시 괴로워했다. 더 큰 희생을 막으려면 사람들과 접촉을 줄이고 매사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신부는 그를 맞아들이는 집안 식구에게도 아무에게나 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또 아무도 그가 와 있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교우 하인들까지도 그것을 그저 짐작만 하는 때가 여러 번 있었다."(「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77쪽)

 그는 은신 중에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라는 고해 지침서를 저술했는데, 한글로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정약종이 한글로 저술한 「주교요지」를 보고 "목초나 땔나무보다 더 중요하다"고 평가할 정도로 조선어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그는 특히 평신도 지도자들을 앞세워 신앙 공동체 결속을 다졌다. 최창현을 총회장으로, 강완숙을 여회장으로, 덕산 출신 정 베드로를 내포지방 회장으로 임명했다. 성직자가 없는 터라 회장제를 정착시켜 교회 조직을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또 명도회(明道會)를 설립하고 정약종을 회장으로 내세웠다. 중국 북경교회 단체들을 모범으로 조직한 명도회는 "회원들간에 서로 돕고, 종교의 깊은 지식을 배워 얻고, 그것을 교우들이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목적을 표방하고 있다. 아울러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은 조선 사회에서 여성을 회장으로 임명해 내세운 점도 특기할만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입국 직전 4000여 명이던 신자 수는 1만 여명으로 증가했다. 회장제와 명도회는 박해시대 신앙 공동체 결속과 복음전파에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주로 서울에 있는 강완숙의 집에 거처했지만, 박해가 있을 때마다 지방으로 여려 차례 몸을 숨겨야 했다. 조선에서 활동한 6년 4개월 동안 박해가 잠잠해지면 활동을 하고, 박해가 극성을 부리면 은신하는 식이었다.

 1801년 조선 전역에 또 박해의 광풍이 휘몰아쳤다. 그는 중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일단 황해도 해주로 피신했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신자들이 희생을 치르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 3년 전에도 체포된 원 야고보가 신부 행적을 끝내 발설하지 않고 순교의 길



가톨릭평화신문  201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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