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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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5)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

천주님은 천지의 큰 임금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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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재(경기도 남양주시 조안읍 능내리) 정다산 유적지에 정씨 형제 생가가 복원돼 있다.
약종을 비롯한 정씨 형제들은 이곳에서 이벽, 이승훈, 황사영 등 신앙 선조들과 자주 서학(西學)을 논하며 천주 신앙에 눈을 떠갔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부친 재원의 3년 시묘(侍墓)살이를 끝내는 날, 형제들에게 말했다.

 "저는 아버님 제사를 모실 수 없습니다."

 그러자 맏형 약현은 "아버님이 그토록 천주교를 멀리하라 타일렀거늘, 그것을 끝내 버릴 수 없단 말이냐?"하며 약종을 꾸짖었다. 약종은 위로는 약현과 약전, 아래로는 약용을 둔 4형제의 셋째였다.

 약종은 형의 질타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결심을 굳힌 터였다.

 "저는 형님이나 아우처럼 벼슬길에 나간 것도 아니고…. 천주는 천지의 임금이요 큰 아비이니, 초야에 묻혀 천주를 섬기고 교리를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천주교에 눈뜬 마재의 정씨 형제들

 경기도 마재(현 남양주시 조안읍 능내리)의 명망 높은 가문 후손인 정씨 형제는 누구보다 일찍 천주교에 눈을 떴다. 1784년 겨울 한양 수표교 부근 이벽의 집에서 첫 세례식이 거행될 때 약전과 약용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약종도 2년 후 형 약전한테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정씨 형제는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다 발각돼 고초를 겪고, 이후 전라도 진산에 사는 외사촌 윤지충(바오로)이 조상제사를 폐한 죄로 1791년 신유년에 참형을 당하자 천주교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약전과 약용은 다시 문과에 급제해 관직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약종은 달랐다. 형제들이 천주교를 택하는 것을 보고 잘못된 교리라며 배척했으나, 어느 순간 자신이 찾아 헤맨 철학적 진리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을 깨닫고 오로지 거기에 매달렸다. 약종은 형제들과 달리 애초부터 인간 삶의 근원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과거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문예 공부에 거리를 두고 도교에 빠져 들기도 했다. 진리 탐구에 뜻을 둔 그의 학문적 열의와 신중함은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약종은 벼슬과 권세에 대한 미련을 버린 터라 아내와 아들 철상(가롤로)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그의 형과 아우만이 마재 강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근심어린 시선으로 약종을 배웅했다.

 마재 강 건너편 양근 분원으로 이주한 약종은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하층민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교리를 가르쳤다. 충청도 출신 머슴 임대인(토마스)과 천민 출신 최기인 등에게 천주 신앙을 전했다. 불평등한 봉건적 신분제를 복음의 평등사상으로 타파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맏아들 철상, 둘째 아들 하상(바오로), 딸 정혜(엘리사벳)에게도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황사영(알렉시오)은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한 백서(帛書)에서 약종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세상일은 도무지 관여하지 않으며 특히 철학과 도덕 공부를 좋아했다. 그는 몸이 아프거나 배가 고프거나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였고, 교리에서 한 부분이 모호하게 되면 식욕도 잃고 잠잘 생각도 잊은 채 그침 없이 탐구하여 끝내는 그것을 밝혀내고야 말았다. 말 위에 있든 배 위에 있든, 깊이 묵상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무지한 이들을 보면 그들을 가르치는 데 온 정성을 다했는데…."

 약종은 1794년 무렵부터 한양에 자주 올라와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왕래했다. 당시는 교황청의 조상제사 금지 조치로 인해 양반층 신자들이 천주교에 등을 돌리고, 대신 양반 특권을 포기한 사람들이나 중인 이하 신분층 인물들이 교회를 이끌어갈 때였다.

 약종은 천주 신앙만이 진리라는 믿음에 한치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서 조상제사 폐지로 양반사회가 술렁이건, 형제들이 관직에 오르건 동요하지 않고 신앙에 정진할 수 있었다.




 
▲ 정약종은 신유박해(1801년) 때 옥에 갇혀 수 십번의 신문과 매질을 당했지만 천주 신앙에 대한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큰아들 철상이 옥고를 치르는 아버지 약종을 찾아가 먹을 것을 전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약종의 42년 생애에서 명도회(明道會) 초대회장 직책 수행과 한글교리서 「주교요지」 편찬은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조선 잠입에 성공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1796년경 교리연구와 전교활동을 위해 명도회란 평신도단체를 조직하고 약종을 초대회장에 임명했다. 약종은 그 직책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특히 교리연구에 공을 들였다. 당시 교우들은 선교사 없이 신앙을 수용한 터라 교리지식이 일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명도회를 통해 신자들 교리지식 수준을 높이고, 그 신자들을 파견해 재교육과 선교활동을 강화하겠다는 게 주 신부와 약종의 계획이었다. 명도회 집회 장소는 서울 약현에 있는 황사영(약종의 조카) 집을 중심으로 서울 각처 6곳으로 늘었다. 신자들은 이를 육회(六會)라고 불렀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약종은)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을 보면 혀가 굳고 목이 아프도록 힘을 다해 가르쳤는데, 아무리 어리석고 둔한 사람이라도 깨우치지 못하는 자가 드물었다"며 그의 교리지식을 높이 평가했다.

 또 "그는 사람들이 별의별 도리를 다 물어도 마치 호주머니 속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았고, 말이 끊어지는 일이 없었으며, 계속해서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는 데도 조금도 막히는 일이 없었다"고 밝혔다.

 최초의 한글교리서 「주교요지」는 그가 혼신의 노력을 다해 매달린 교리연구의 독창적 결과물이다. 당시 중국에서 들여온 한문서학서는 양반이나



가톨릭평화신문  2011-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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