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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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7) 강완숙(골룸바, 1761-1801년)

조선 초기 교회사에 빛나는 여성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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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 신부가 국내에 들어온 것이 알려져 포졸에게 쫓기고 있을 때, 강완숙은 그를 구할 수 있다는 용감한 생각을 했다. 그는 우선 자기 집 장작 광에 주 신부를 숨기고, 시어머니와 아들까지도 모르게 석 달 동안 그곳으로 음식을 날랐다.
 강완숙은 주 신부에게 좀 더 편한 피신처를 마련해 드릴 수 없어 괴로워하며, 시어머니 마음을 움직일 계획을 세웠다. 한 방편으로 계속 울며 기도하고, 먹지도 않고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잃을까 봐 겁이 나서 그렇게 근심하는 까닭을 물었다. 강완숙은 주 신부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조선인들 영혼을 구하려고 왔는데, 피신시킬 곳도 없게 됐다는 것과 자신이 남장을 하고서라도 신부님을 피신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네가 그렇게 하면 내가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느냐. 나도 너를 따라가서 함께 죽겠다`고 했다. 이때 강완숙이 `어머님 말씀에 매우 위로를 받았습니다. 신부님을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내놓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람들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천주님께서 우리의 착한 뜻을 보시고 신부님을 우리 있는 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이 동의하신다는 확약만 주신다면 저는 곧 마음의 평화를 얻고 기쁨을 되찾아 어머님께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너하고 떨어지기 싫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하고 승낙했다. 강완숙은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주 신부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를 안사랑에 모셔 들였다. 주 신부는 거기서 외부 사람들이 양반 집 안채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는 조선 관습의 보호로 6년간 머물렀던 것이다.…"

 달레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강완숙이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는 내용을 기록한 부분이다. 남녀가 7살만 되어도 함께 앉아서는 안 된다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유교사회에서 아녀자가 외간 남자를 집에 들인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강완숙이 목숨을 걸고 주문모 신부를 보호한 덕분에 교회는 명맥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강완숙이 초창기 한국교회에 공헌한 가장 큰 업적이다. 이는 또한 그가 순교하는 원인이 됐다.

 강완숙(姜完淑)은 한국교회사에 등장하는 여성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다. 교회사뿐만 아니라 한국 여성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18세기 당시 대다수 여성들은 집에서만 생활했고, 모든 행동에는 제약이 따랐다. 강완숙은 여성의 활동범위를 가정에서 사회로 확장시켰다. 교회라는 틀 안에서이긴 하지만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며, 동정녀와 과부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리고 교리연구 모임인 명도회 여회장직도 맡았다. 이는 당시 양반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완숙은 1761년 충청도 내포 지방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성격이 올곧아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덕산 지방에 사는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간 강완숙은 졸렬한 남편과 마음이 맞지 않아 항상 우울하고 답답한 나날을 보내면서 속세를 떠날 생각도 했다. 한때 불교에 귀의하기도 했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해 발을 끊었다.

 그때 마침 충청도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들어왔다. 그는 천주교라는 말을 듣고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敎)의 이름이 바르니, 교의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다`는 생각에 책을 구해 읽고 마음을 기울여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책을 얻어 읽는 가운데 그리스도교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이후 강완숙은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그는 총명하고 부지런했으며, 매사에 열성적이었고 자제력이 뛰어났다. 그는 먼저 시어머니와 전처 아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아들 홍필주(필립보)는 1801년에 순교한다. 또 가까운 친척들을 교화시키면서 여러 이웃 마을까지 전교했다. 그러나 온갖 노력에도 남편만은 입교시킬 수 없었고, 오히려 신앙 때문에 남편에게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살림을 차렸다. 열렬한 신자인 아내 때문에 자기도 피해를 입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고향이 소란해지자 그는 시어머니와 아들과 의논한 뒤 함께 한양으로 올라왔다. 조선시대에 시어머니가 아들을 두고 며느리를 따라 나선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평소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긴 데다가 며느리 전교로 이미 독실한 신앙인으로 거듭난 시어머니였기에 기꺼이 며느리를 따라 나설 수 있었다.

 강완숙은 지황(사바)과 윤유일(바오로) 등이 1794년 주문모 신부를 영입할 때 경제적 뒷받침을 해줬고, 교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도왔다. 강완숙은 조선땅에 들어온 주 신부에게서 정식으로 세례를 받았다. 강완숙의 영리함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한 주 신부는 그를 여회장으로 임명하고 여신도들을 돌보게 했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자신의 집을 주 신부 피신처로 내놓았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함부로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관습이었다. 강완숙은 포졸들이 대문 앞까지 왔을 때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등 주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강완숙은 주 신부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를 다녔으며, 그때마다 그 집은 신자들 집회 장소로 활용됐다.

 그는 6년 동안 자기 집에 주 신부를 모시고 교회의 중요한 업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주 신부의 절대적 신임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강완숙은 물심양면으로 주 신부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강완숙은 지식과 재치를 겸비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킬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도 있었고, 머슴과 하녀 같은 천한 이들도 있었다. 왕실 친척인 송 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 마리아가 주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게 한 이도 강완숙이다. 그는 동정녀와 과부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친 후 그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방문해 신앙을 권유토록 했다.

 당시 신자들은 "골룸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했으며, 열심한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 같았다"고 강완숙을 칭송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그동안의 활동으로 즉시 관청에 고발됐고, 4월 6일 집안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체포돼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는 그 와중에도 주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리들은 강완숙에게 주 신부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의 굳은 신심은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하고 감탄할 정도였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강완숙은 신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던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사형 판결을 받은 그는 1801년 7월 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처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가톨릭평화신문  201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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