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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⑨ 원시보 야고보(1730~1799)ㆍ배관겸 프란치스코(1740~1800)

혹형 참고 견뎌내 빛나는 ''순교 화관''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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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9년 4월 초. 청주병영에 늙은 수인이 끌려왔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병영에 이송된 원시보(야고보, 1730~99)였다. 그 역시 회유를 받았다. 배교한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렇지만 끈질긴 회유와 위협에도 그는 순교를 하겠다는 원의를 굽히지 않았다.

 "내가 하느님을 위해 순교자로 죽기를 갈망한 지 9년이나 됩니다."

 이 말에 관장은 몇 날 며칠을 때렸다. 회초리는 약과였고 몽둥이와 곤장, 주뢰질 등 갖은 혹형이 가해졌다. 늙은 육신으로 그가 참고 견뎠을 고통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아전과 백성들은 그가 1000대가 넘게 맞았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온갖 형벌을 굳게 견디던 그는 그해 4월 17일 순교의 화관을 쓴다. 그가 죽은 뒤 시신 위로 놀라운 광채가 나타났고, 이 광채를 보고자 많은 외교인들이 모여 든다. 이 때 50여 가족이 입교했다고 전해진다.

 원시보와 함께 청주병영에 갇혀있던 배관겸(프란치스코, 1740~1800)도 다른 교우들과 고통을 함께한다. 그럼에도 영웅적 인내로 그는 모든 것을 견뎌낸다. 하지만 매질이 계속되면서 이듬해인 1800년 1월 7일 숨을 거둔다.

 

 옛 청주병영이 자리했던 곳은 211년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공원으로 바뀌었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92의 2, 청주 중앙공원이다. 서울로 치면, 탑골공원 같은 어르신들 쉼터다.

 그곳 한 켠에 원시보와 배관겸의 영웅적 순교를 기리는 `순교자 현양` 빗돌이 세워져 있다. 가로 210㎝에 폭 135㎝, 높이 140㎝ 자연석에 연제식(청주교구 귀농사목) 신부가 글씨를 쓴 순교사적비다. 앞면에는 `순교자 현양` 5글자를, 뒷면에는 원시보와 배관겸, 김사집(프란치스코), 오반지(바오로), 장 토마스 등 청주교구 관할 시복시성 대상자 5위의 순교행적을 147자로 새겨 순교사적을 전한다.



 
▲ 원시보가 주문모 신부에게서 축첩을 한 자는 성사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나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첩을 내보내고 있다.
그림=탁희성
 
 
 이 빗돌은 2001년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아 그해 9월 청주에서 열린 전주교구 가톨릭예술단의 `님이여 사랑이시여` 공연수익금으로 이듬해 5월 충주ㆍ청주 중앙공원에 각각 세운 빗돌 가운데 하나로, 10년째 청주 지역 평신도들이 신앙 선조들, 특히 순교자들의 삶과 영웅적 행적을 기리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지금은 공원을 사목구역으로 삼고 있는 청주교구 서운동본당(주임 최광조 신부)에서 관할을 맡고 있다.

 정업택(히지노) 전 교구 평협 회장은 "해마다 9월 순교자성월 첫주 토요일이면 청주지역 평신도들이 모여 묵주기도와 함께 공식 참배행사를 갖고 있다"며 "10년 전 순교자현양비가 세워지면서 청주에서도 순교신심에 대한 관심이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고 현양비를 찾아 묵주기도를 바치는 순례자들도 늘었다"고 전했다.


 #청주의 첫 순교자가 된 원시보

 `청주 첫 순교자`로 꼽히는 원시보는 충청도 홍주(현 홍성) 응정리 출신이다. 지금의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다.

 평민 출신인 그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건 1788년, 아니면 1789년께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나이 60살이 다 돼서야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것이다. 사촌동생인 원시장(베드로, 1732~93)과 함께였다.

 입교 이후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전 재산을 희사하고 금요일마다 금식했으며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데 노력했다. 교회 가르침을 지키는데도, 온갖 덕행을 실천하는데도 충실했다. 어질고 순하며 정직하고 활달한 그의 성품은 그가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큰 밑거름이 됐고, 덩달아 그의 이름도 널리 알려졌다.


 
▲ 주문모 신부가 지역 순방에 나섰다는 소식을 들은 배관겸이 현재의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에 강당을 마련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그래서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도 곧바로 추포 대상자가 됐다. 홍주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원시보와 원시장을 체포하도록 했으나, 원시보는 이미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한 뒤였다. 다만 원시장은 포졸들에게 붙잡혀 갖가지 혹형을 받은 뒤 1793년에 순교한다. 훗날 순교 소식을 접한 그는 사촌동생과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뉘우치며 더 열심히 수계하며 교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조선에 들어온 첫 선교사 주문모 신부와 원시보 간에 벌어진 얘기는 잘 알려진 일화다. 1795년께 그는 주 신부를 만나 성사를 청했다.

 하지만 주 신부는 그에게 성사를 주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두 처를 거느린 모든 남자는 교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니 즉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

 이 말에 충격을 받은 그는 사흘 밤낮을 울면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신자들이 주 신부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주 신부는 그제서야 "네가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첩을 내보내겠느냐? 그러면 내가 성사를 줄 수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너는 다시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하고 잘라 말했다.

 이에 그는 교회에서 "축첩이 금지돼 있는 것을 몰랐다"며 집에 돌아가는 즉시 첩을 내보낼 것을 약속하고 성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선 집에 돌아가선 곧바로 첩을 내보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97년 정사박해가 충청도 전역을 휩쓴다. 이 와중에 원시보도 1798년에 체포돼



가톨릭평화신문  2011-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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