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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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서소문을만나다] <2> 서소문 형장은 어디

빌딩 숲에 묻혀버린 순교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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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1년 신유박해 이후 1866년 병인박해 시기까지 60여 년간 피의 박해로 점철된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은 어디일까.

 서소문 순교 현양탑이 세워져 있는 서소문 근린공원은 순교탑을 세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공공부지일 뿐 정확한 순교사적지는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서소문 근린공원에 순교탑 세워

 그 형장 터가 자리하고 있는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는 오늘날 빌딩숲에 갇혀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서소문 터에서 내려오는 서소문로(구 양화대로)와 통일로(구 의주대로)가 엇갈리고, 서소문로 위로는 네거리를 통과하는 서소문 고가도로가 있다. 그리고 서울역에서 의주로2가 쪽으로 비스듬히 경의선 철도가 지난다. 일제강점기와 6ㆍ25전쟁, 경제개발로 조선 후기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일컬어지던 신전(新廛)이 자리잡고 있던 서소문 밖 네거리도 변모에 변모를 거듭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중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이유로 1914년 서소문(소의문)이, 1915년엔 서대문(돈의문)이 각각 헐리면서 기단석 하나 남기지 못했다. 이러니 신전 근처 만초천변 하천부지에 있던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도 본래의 제모습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역사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 속에 서소문 밖 형장은 실재했고 그 순교 숨결은 미약하나마 기록을 통해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일성록」 등 관변사료에 따르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선 목을 베어 죽이는 참형(斬刑)이 22차례 집행됐고, 죄수에게 최대한 고통을 안겨주려고 보통 3000회에 걸쳐 칼질을 하는 능지처사(陵遲處死) 형벌도 35차례나 이뤄졌다.

 순교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천주교인들은 주로 참형에 처해졌고, 특별한 경우엔 능지처사형을 받았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혹형 중 혹형을 받으며 순교자들은 `기쁘게`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러기에 크나큰 고통을 겪으며 순교자들이 순교의 화관을 쓴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답사와 고증, 연구는 그간 가톨릭교회와 일부 사학자들 사이에서 계속돼 왔다.

 이 중 역사지리학자인 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12월 (사)서울시문화사학회 주최로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와 위치 비정(批正)`이라는 주제 논문을 통해 매우 주목할 만한 주장을 내놓았다.

 서소문 형장은 서소문 밖 네거리의 신전 장터, 즉 의주로를 지나 만초천변 빈터에 있었고, 그 지점은 행정구역상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 267번지에 해당된다는 것. 현재 위치로는 서울 지하철2호선 충정로역 3번 출구를 빠져나와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경의선 철도 건널목을 지나면 곧바로 마주하는 지하 4층, 지상 19층 규모 임광빌딩 본관 남쪽 광장이다.


 
▲ 지금은 폐쇄된 서소문파출소에서 바라본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터.
주차장으로 쓰이는 임광빌딩 남쪽 광장 오른쪽이 형장터이고, 왼쪽이 망나니들이 형구를 닦는데 썼다는 증언이 나오는 우물터다.
이힘 기자
 
 

   #미근동 임광빌딩 남쪽 광장이 유력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순교한 조신철(가롤로) 성인의 목격담도 서소문 형장이 서소문 밖 네거리의 신전 장터, 즉 양화로에서 의주대로를 지나 만초천변 공터에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또 이 광장에는 과거 소위 `망나니 우물`이라고 불렀던 우물이 있었는데 그 명칭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망나니(회자수)들이 형을 집행한 뒤 이 우물의 물을 길어 형구를 닦았다는 증언도 한국순교자현양회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19세기 말 서울을 찾아 서소문 행형장을 목격한 외국인들도 최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독일인 마엣(P. Mayet)도 「서울, 제2의 고향-유럽인의 눈에 비친 100년 전 서울」(김영자 번역)에서 1883년 10월에 쓴 방한기를 통해 서소문 밖 네거리에 방치된 사형수의 시신을 목격한 소감을 전하고 "우리가 나가는 성 밖의 길목이 처형장이었다"고 기록했다.


   #유럽인 방한기에도 처형장 기록 남아

 또 1894년에 서울을 다녀간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헷세-바르텍도 자신이 쓴 책을 통해 "형이 무거운 참수형이나 육시형의 경우 서소문 밖 작은 공터에서 시행되는데, 그 근처에는 민가 몇 채가 있다"며 형장 위치를 서소문 네거리 인가 몇 채가 있는 공터라고 증언한다.

 이들이 지적한 서소문 밖 작은 공터는 서소문 밖 네거리의 왼쪽 상단부이며, 지형적으로는 서소문 구릉 사면과 만초천변 저지대 접촉부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 교수는 "서소문 일대 도로는 19세기에 비해 3배로 확장됐고, 만초천은 복개됐으며, 경의선 철도는 옛 장터(신전)를 지나고 있는데 경의선 철도가 스쳐가는 임광빌딩 남쪽 광장이 과거 행형장터로 추정된다"면서 "이 광장의 서쪽은 망나니 우물 자리였고, 동쪽은 행형장터였다"고 밝힌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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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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