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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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서소문을 만나다] <3> 서소문 순교성인들 44위

서소문 순교자 84위 가운데 44위 시성... 1416년부터 형장으로 사용해... 신유박해 이승훈 시작으로 60여 년에 걸쳐 84명 순교... 대부분이 박해시기 지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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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1년 4월 8일이었다. 서소문을 통해 15m쯤 낮은 성 밖 저지대로 끌려온 이승훈(베드로) 등 천주교 신자 6명은 칼을 쓴 채 봄꽃이 막 피어나는 만초천 하천 부지에 무릎을 꿇었다. 한국천주교회 사상 첫 영세자인 이승훈과 동료 신자들은 호된 문초와 형벌에 이미 만신창이였다.

 무악산에서 발원, 용산으로 흐르는 만초천(욱천)변에는 이미 시전 백성들이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형조 관리들의 엄명에 망나니들이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칼춤을 추던 망나니들의 칼날에 신자들은 참수치명한다. 4대 박해의 첫 손가락에 꼽는 신유박해의 서막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5월 11일에 2명, 5월 14일 6명, 6월 1일 1명, 7월 2일 9명, 10월 4일 2명, 11월 28일 2명, 12월 10일 3명 등 모두 31명이 처형된다. 대부분 참수 치명했지만, 11월 28일과 12월 10일 처형된 황심(토마스)과 황사영(알렉시오)만은 능지처사형을 당했다.

 만초천변 하천부지, 곧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선 60여 년간에 걸쳐 천주교 신자만 84명이 피를 흘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41명, 1866년 병인박해 이후에도 1871년까지 12명이 순교했다.


   #참형 22회, 능지처사형 35회 이뤄져

 이처럼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린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이 서울의 상징적 형장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건 이미 조선 초기 때부터다.

 1416년, 태종 16년 예조에서 "사람은 사(社, 지신 사당)에서 죽인다"고 한 「서경」 기록을 토대로 "사는 (궁궐에서 볼 때) 오른편에 있으니 서소문 밖 성밑 10리인 양천지방, 옛 공암 북쪽으로 다시 장소를 정하소서"라고 하니, 조정에서 이를 그대로 따랐다.

 이때부터 서소문 밖 형장은 서울의 대표적 형장으로 떠올랐다. 물론 용산 당고개에서도 참형이 이뤄졌고, 현 서울 태평로1가 31번지 일대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도 능지처사한 경우가 많다.

 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연구소장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에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형이 22회, 능지처사형이 35회나 이뤄졌다. 또 당고개에선 참형이 17회, 군기시 앞에선 능지처사형이 12회나 행해졌다.


 
▲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 전경.
오른쪽 임광빌딩 남쪽 광장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며 피를 흘린 성지이고, 왼쪽 서소문 근린공원엔 서소문 순교 현양탑이 보인다. 이힘 기자 lensman@
 

 
▲ 오늘날의 서소문 밖 네거리 약도.
 

 
 84명에 이르는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곳은 바로 서소문 밖이었다. 새남터나 당고개, 노량사장 등지에서도 천주교인들의 사형이 집행됐지만, 서소문 밖 형장 순교자 수에 미치지 못한다.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성지 가운데 양화진 형장은 특히 천주교인들의 군문 효수에만 이용된 형장이었다.

   #순교자 대부분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

 서소문 밖에서 순교(치명)한 84명 가운데 44명이 시성됐다는 사실은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이 한국 천주교 순교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미 시성된 순교자들은 주로 기해박해(41명) 와 병인박해(3명) 시기 순교자들로, 대부분 죽기까지 신앙을 고수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또 박해기 교회사에서 지도층으로 활동한 경우가 많다.

 기해박해 때 남명혁(다미아노) 회장과 이광헌(아우구스티노) 회장, 이광렬(요한) 지도자, 정하상(바오로) 회장,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지도자, 남이관(세바스티아노) 회장, 김제준(이냐시오) 회장, 현경련(베네딕타) 회장 등 8명이 대표적이다.


   #가장 중요한 순교터이자 순례지

 이들은 1811년께부터 신유박해로 풍비박산된 교회를 재건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데, 이들의 중심 인물은 정하상이었다. 정하상은 이여진 등의 도움을 받으며 중국 베이징대목구를 9차례나 방문해 선교사제 영입 운동을 주도했다.

 이같은 노력의 결과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를 설정, 조선교회를 베이징대목구에서 분리 독립한다. 이어 1836년 1월에는 파리외방선교회 피에르 필베르 모방 신부가 서양인 선교사로는 최초로 입국, 조선 선교에 들어가면서 조선교회가 상당한 발전을 이루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 병인박해 순교자 중에서도 남종삼(요한)과 전장운(요한), 최형(베드로) 등 3명도 교회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866년 서소문 밖 순교성인 가운데 남종삼은 승지를 역임한 양반 가문 출신이었으나, 주류는 일반 평민들이었다. 특히 전장운이나 최형은 당시 서울 약현 일대를 중심으로 전국에 교회 서적을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한국천주교회에서 서소문 밖 네거리를 가장 중요한 순교 터이자 순례지(사적지)로 꼽는 이유는 교회의 주도 계층들이 바로 이곳에서 순교하며 신앙을 증거했기 때문이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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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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