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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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⑪ 박취득 라우렌시오ㆍ황일광 시몬

살을 찢고 뼈를 깎는 고통에도 "하느님 나라"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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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끼줄에 목 졸려 당당하게 순교  

  제4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한국명 안돈이)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이렇게 전한다.

 "1799년 음력 2월 29일 홍주(현 홍성). 박 라우렌시오가 홍주에서 매질로 죽음을 당했다. 그의 생애(에 관한 자료)는 이미 내가 보낸 바 있으며, 더는 첨가할 것이 없다. 그는 우리의 훌륭한 신앙 증거자들 중 첫 대열에 들어 있다."

 이렇게 다블뤼 주교에게 `훌륭한 신앙 증거자들 중 첫 대열에 들어 있다`는 찬사를 받은 박취득(라우렌시오, ?~1799)은 홍주 면천 출신이다. 오늘날 충남 당진군 지역으로, 1791년 당시 면천 고을 관아엔 엄청난 수의 교우들이 투옥돼 있었다. 많은 교우들이 옥에 갇혀 여러 달째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를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던 박취득은 헌신적으로 옥바라지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감 교우들에게 막 식사를 제공한 그는 관장에게 찾아가 "무고한 백성들을 가혹하게 매질하고 여러 달 옥에 가두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했다. 이에 화가 난 관장은 그를 붙잡았다. 이어 그가 천주교인 박일득의 형제라는 사실을 확인한 관장은 그에게 칼을 씌운 채 혹독하게 매질을 했다.

 그럼에도 박취득은 동요하지도 않고 겁을 내지 않은 채 "이 나무칼은 너무 가볍다"면서 "쇠칼을 씌워달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 말에 난처해진 관장은 박취득을 해미 관아를 거쳐 홍주로 보냈다. 홍주 관아에서도 혹독하게 곤장을 맞았지만 그는 그 뜨거운 첫 신앙을 버리지 않고 굳게 지켰다. 그러기를 한 달여. 조정의 전갈을 거쳐 박취득은 석방됐다. 이같은 신앙에의 항구함과 재판관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반석 같은 마음은 교우들에게 큰 위로를 안겼다.

 그러나 체포와 장기간 구금, 혹독한 문초와 고문은 1791년의 일로만 끝난 게 아니었다. 6년 뒤 홍주에 다시 박해가 일어나면서 박취득에게 다시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는 몸을 숨겼지만 자신의 아들이 잡혀가자 스스로 면천 관아에 몸을 드러내 자수를 선택한다. 1798년 8월 19일이다.

 관장이 도망간 것을 꾸짖자 박취득은 이렇게 답변한다. "저는 관장의 명령을 받기 전에 떠났는데 제 아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의 명을 받아 이렇게 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 말에 관장이 "너는 어찌하여 국왕과 관장들이 금하는 나쁜 도를 따르느냐"고 묻자, 그는 "저는 나쁜 도를 따르지 않고, 다만 만물을 창조하신 천주를 숭배하라고 가르치는 참 종교의 몇몇 계명을 지킬 뿐입니다. 저는 천주님을 공경하고 다음에는 임금님과 관장들과 제 부모와 다른 어른들을 공경하며, 제 친구와 형제들,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했다.

 그 뒤로도 7개월간 네 차례에 걸쳐 심문과 문초가 계속됐다. 우스꽝스러운 질문에 똑같은 답변이 이어졌고, 살을 찢고 뼈를 깎는 듯한 문초에도 인내하는 마음을 결코 굽히지 않았다.

 "네가 말하는 그 천주가 무엇이며,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느냐?"

 "천주는 하늘에 계시며 거기에서 당신의 명령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을 지키면 당신 곁에 불러올리실 것이고, 대항하면 지옥에 떨어트릴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천주님의 은혜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같이 불쌍한 인간이 제 모든 웃어른보다 더 많이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지라도 그분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 박취득 라우렌시오가 온갖 형벌에도 굴하지 않자 포졸들이 새끼줄로 목을 졸라 죽이고 있다. 그림=탁희성
 
 
 이어 해미관아로 이감돼 1년간 열여섯 차례에 걸쳐 1400대 매를 맞는 등 갖가지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투옥 중 박취득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가 감동의 여운을 남긴다.

 "불효 자식 라우렌시오는 옥중에서 어머니께 제 심정을 알려드립니다. 저는 항상 천주를 지성으로 섬기고 부모께 효성을 다하며 형제와 화목하고 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천주의 명을 지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저는 천주께 죄를 범하고 부모와 형제에 제 모든 본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육신과 세속, 마귀의 삼구(三仇)를 이기지 못해 수없이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어머니 제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제 죄를 사해 주시고 제 영혼을 구해주시도록 천주께 기구하여 주십시오.…"

 옥에서 끌려나가 매질을 당하는 아픔이 계속됐다. 때론 형리들이 옷을 벗긴 뒤 상처 입은 몸을 진흙 속에 버려두고 일부러 고통을 겪도록 하기도 했다. 당시 모친에게 보내는 옥중 서한에서 십자가 발현을 언급하던 그는 새끼줄에 목이 졸려 숨을 거둔다. 1799년 기미년 2월 29일, 양력으로 4월 3일의 일이다. 그의 나이 30살이었다.


   #다리 부르지는 고통에도 신앙 증거

 홍주 순교자로는 황일광(시몬, 1757~1802)도 빼놓을 수 없다. 홍주 천민 출신으로 `백정`이던 그는 1792년 홍산으로 이주한 뒤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이후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경상도로 이주했다가 1800년 2월 경기도 광주로 이주,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이웃해 살면서 황사영(알렉시오), 김한빈(베드로) 등과 교류했다. 정약종이 서울로 이주하자 서울 정동으로 옮겨와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드디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한 쪽 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천주교는 성스러운 종교다"라고 말하며 조금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인 홍주로 이송돼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45살이었다.

 그에 얽힌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그가 경상도에 이주해 열심으로 교리를 실천하며 살 때 천주교인들이 그를 집안에 맞아들였는데, 당시 천민을 집안에 맞아들이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황일광은 "나에게는 천국이 두 개 있는데, 그 하나는 사람들이 나을 위해 주는 지상천국이고, 또 하나는 후세에 있는 천국"이라고 말하곤 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2-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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