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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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⑫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1816~1867)

제주도에 복음 씨앗 뿌린 제주 출신 첫 신자이자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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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와 벗님네야 치명(致命)길로 횡행하세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어렵다 치명길이야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평생 소원 사주모(事主母)요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주야 앙망 천당이로다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도(能到) 주대전 하옵소서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이 지은 천주가사(天主歌辭)다. 이 가사는 교우들을 벗으로 표현함으로써 깊은 형제애를 드러내고, 순교야말로 신앙의 극치임을 밝히고 있다. 끝부분에 자신의 이름(세례명)을 밝힌 것도 특이하다. 복음을 전하고 권장하는 목적 외에도 자신의 순교 신심을 다지기 위해 지은 것으로 보인다. 김기량은 이처럼 평소 자신의 학식을 바탕으로 신앙에 관한 글을 지어 외우면서 신심을 북돋웠다.

 김기량(1816~1867)은 제주도 사람으로는 가장 먼저 세례를 받고 가장 먼저 순교한 하느님의 종이다. 또 한국교회가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125위 가운데 제주도 출신으로는 유일하다. 김기량이 시성되면 제주교구가 배출하는 첫 번째 성인이 된다. 그는 독특하게도 우리나라가 아닌 홍콩에서 세례를 받았다. 여러 면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 김기량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자.

 김기량은 1816년 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총명한 머리에 강한 의지, 그리고 학식을 갖춰 사람들에게 김 선달(先達, 과거에 급제했으나 아직 벼슬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배를 구입해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특출난 재능을 발휘했다.

 김기량이 복음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오묘한 하느님 섭리였다. 1857년 2월 41살 김기량은 동료들과 함께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됐다. 동료들을 모두 잃고 해류에 밀려 중국 광동 해역까지 흘러간 그는 영국 배의 구조를 받았다. 영국 배는 그를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냈고, 김기량은 그곳에서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난다. 바울리노는 1854년 최양업 신부에게 발탁돼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건강이 나빠져 홍콩으로 휴양 온 참이었다.

 김기량은 이곳에서 80여 일 머무는 동안 루세이 신부 지도 아래 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웠고, 그해 5월 세례를 받아 제주도 출신 첫 번째 신자가 됐다.
 이듬해 귀국한 김기량은 갖은 고생 끝에 교우촌을 찾아가 최양업 신부와 페롱 신부를 만났다. 당시 최 신부는 오두재(현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에, 페롱 신부는 이곳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막골(모동면 신흥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두 신부는 김기량의 성실함과 신앙에 대한 열정을 보고는 그가 `제주도의 사도`가 될 것을 확신했다. 최 신부는 김기량에게 서적과 성물을 주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최 신부는 김기량을 만난 뒤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를 만나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하심과 섭리에 대해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제주도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그는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장차 좋은 교우가 될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는 우리를 하직하면서 자기가 제주도 고향으로 돌아가면 먼저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후 저에게 다시 오겠다고 말했습니다."(최양업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58년 10월 4일자 서한)

 1년 2개월 만에 고향 제주로 돌아온 김기량은 관아에서 문초를 받았다.
 "사뢰오되, `너는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무슨 일로 바다에 나갔다가 다른 나라에 표류해 해를 보내고 달을 넘겨 지금에서야 돌아왔는지 그동안의 사정을 숨김없이 바로 아뢰거라`하고 신문했습니다.
 이에 사뢰오되, `저는 약재를 싣고 무역자 문영환ㆍ박식근ㆍ문광철ㆍ한앙문 등 4명과 함께 한 배를 타고, 지난 정사년(철종 8년 1857년) 1월 24일에 서귀포를 향해 가다가 갑자기 사나운 바람을 만났습니다. 이에 실었던 무명과 겉보리는 모두 잃어버렸고, 다만 양식 한두 말만 남아 있었으므로 끓여서 미음을 만들어 겨우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 양식이 떨어지자 배 위에서 혼절했습니다.(…) 3월 초닷새에 대청국 광동성 향항도(홍콩)에 도착해 저를 하선시켰습니다.`"(「제주계록」 함풍 8년(1858년) 4월 기록 중에서)

 김기량은 고향 땅 제주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860년에는 가족을 중심으로 20여 명을 입교시킬 수 있었고, 자신의 배에서 일하는 선원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예비신자가 되게 했다. 그의 고군분투에 힘입어 1866년께 제주 천주교인은 4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무렵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김기량에게 선교사 1명을 제주에 파견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는 영세 준비를 마친 예비신자들을 데리고 신부를 만나러 육지를 왕래해야만 했다. 앞서 소개한 천주가사는 이 시기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김기량의 전교 활동은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여느 때처럼 무역을 하러 경상도 통영으로 나갔다가 그곳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됐다. 통영 관아로 끌려간 김기량은 수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는 결코 굴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켰다. 옥에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는 "나는 순교를 각오했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하고 권면했다.

 통영 관장은 대구 감사에게 `김기량과 그의 동료들을 배교시킬 수 없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대구 감사는 `그들을 때려죽이라`는 명을 내렸고, 이에 따라 김기량과 그의 동료들은 다시 혹독한 매질을 당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죽지 않자, 관장은 그들을 다시 교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67년 1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 51살이었다. 이때 관장은 특별히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제주교구는 2005년 4월 김기량의 고향인 함덕리에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순교현양대회를 열고 있다. 또 지난 2월에는 본당을 신설하면서 본당 이름을 김기량본당으로 짓는 등 제주 출신 첫 영세자이자 순교자인 김기량의 순교 정신을 드높이고 있다.

 

 
▲ 김기량의 고향인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 있는 김기량 순교현양비.
오상철 명예기자 osach@pbc.co



가톨릭평화신문  201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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