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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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 신앙의 역사, 세계유산을 향해 가다] (3·끝) 히라도·나가사키·시마바라

인구 479명의 작은 섬 쿠로시마에서는/ 주일이면 300여 명의 신자가 미사 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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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라도 - 히라도, 타비라성당, 쿠로시마성당

히라도의 이키츠키섬 전시관에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래 오늘날까지의 역사, 특히 가쿠레키리시탄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불화(佛畵)처럼 생긴 성화나 성물, 의식에 사용하던 도구들, 기도하던 방의 모습을 재현해 놓기도 했다. 전시실에서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끊임없이 방송됐는데 바로 가쿠레키리시탄의 기도소리였다. 250년간 구전으로만 전해져왔기에 정확한 원형이 남아있지 않아 기묘한 기도가 된 것이다. 간혹 들리는 ‘그리스도’나 ‘주 예수’ 등의 단어로 이 소리가 교회의 기도임을 짐작하게 했다.

가쿠레키리시탄. 숨다라는 의미의 가쿠레(隱れ)와 그리스도인이란 뜻의 기리시탄(キリシタン)이 합쳐진 이 말은 신앙을 숨기며 지내는 신자들을 부르는 표현이다. 지금도 많은 가쿠레키리시탄이 교회의 품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히라도 역시 많은 가쿠레키리시탄이 거주하는 곳이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방문으로 나가사키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선교가 시작된 히라도는 박해 역시 가장 빨랐다. 히라도의 이키츠키섬은 6000명의 인구 중 가톨릭신자가 300여 명이지만 가쿠레키리시탄은 500여 명에 달한다. 철저히 숨어든 이키츠키의 가쿠레키리시탄은 박해가 풀리고도 100년 후에나 발견됐다. 절과 신사의 유지를 위해 가쿠레키리시탄으로 남기를 선택한 마츠카와 타케하루(73)씨는 “자신들을 보호해준 절을 지키기 위해 남은 이들도 있지만 아직도 언제 다시 박해가 일어날지 몰라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다”고 가쿠레키리시탄이 아직도 남아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반대로 가쿠레키리시탄이 모두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곳도 있다. 바로 쿠로시마다. 히라도에서 불과 10km가량 떨어진 이 섬은 인구 479명의 작은 섬이다. 하지만 이 작은 섬에는 큰 섬에서도 보기 어려운 커다란 성당이 있다. 500여 명 수용규모에 완전한 형태의 3층 구조 성당인 이 성당에는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주일이면 300여 명에 이르는 신자가 미사에 참례한다. 섬사람 10명 중 8명이 신자인 이 섬에는 가쿠레키리시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앙의 역사가 짧은 것은 결코 아니다.

쿠로시마의 신자들은 대부분 소토메 출신이다. 1650년대 박해를 피해 소토메로 숨어들기 시작한 신자들은 1797년 고토로 이주했지만 그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금 이주한 곳이 쿠로시마다. 그리고 나가사키에 오우라성당이 세워지자 쿠로시마 가쿠레키리시탄 회장이었던 데구치 다이스케가 오우라성당을 찾아가 올바른 기도법을 배우고 세례를 받아 쿠로시마의 가쿠레키리시탄이 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었다.

선조가 소토메 출신이라는 야마우치 카즈나리(요셉·57)씨는 “데구치 다이스케가 없었다면 쿠로시마도 가쿠레키리시탄이 많았을 것”이라며 “지금도 쿠로시마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일주일 만에 세례를 주고 신앙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전했다.

쿠로시마의 신자들은 또 히라도로 이주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지은 대표적인 성당이 타비라성당이다. 붉은 벽돌의 웅장한 타비라성당 입구 근처에서 둥글게 쌓여있는 낮은 돌담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조개껍데기를 굽는 가마다. 지금도 교적 상 신자가 800여 명에 이르는 타비라본당은 큰 성당이 필요했지만 선교사들의 자금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조개껍데기를 굽고 빻아 석회가루를 만들어 벽돌을 쌓았다.

타비라성당 옆에는 신자 묘역이 있는데 신자들의 묘비를 살펴보면 소토메-고토-쿠로시마-히라도에 이르는 신자들의 이주여정을 유추할 수 있다. 타비라본당 신자들의 묘에는 소토메, 고토, 쿠로시마 등에서 볼 수 있는 집성촌의 성씨를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쿠로시마성당.
 

 
▲ 타비라성당.
 

 
▲ 가쿠레키리시탄들이 기도하던 방을 재현한 모습.
 


■ 나가사키 - 오우라성당

나가사키의 관광명소로도 유명한 오우라성당은 높은 언덕 위에 세워져 그 위용을 자랑했다. 계단을 절반쯤 올랐을까. 오른편에 커다란 조각이 보인다. 외국인 사제가 일본인들에게 성모상을 보여주는 이 조각은 ‘신도발견’ 백주년 기념비다.

아직 박해가 끝나지 않은 시절, 일본의 쇄국이 해제되자 파리외방선교회는 나가사키의 외국인 거주지에 성당을 건축한다. 외국인들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던 오우라성당은 ‘프랑스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오우라성당을 맡던 프티잔 신부에게 한 일본인이 나타나 어디에서 왔는지 결혼을 했는지 묻고 대답을 듣더니 “마리아 상은 어디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신부가 그에게



가톨릭신문  201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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