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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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서품 60주년 맞은 두봉 주교

“신앙은 곧 희망 … 신나고 즐겁게 살아가십시오”/ 남을 위해 살 수 있었던 60년의 삶 “축복”/ ‘사제로 산다는 것’ … “주님의 부르심이죠”/ ‘가난’은 하느님 앞에서의 ‘빈 마음의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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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복이 이렇게 많아서, 어떻게 나같은 사람이 60년 동안 주님 위해서 또 남을 위해서 살 수 있었는가 싶어요. 그저 하늘에서 마련해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꿈 같아요. 거짓말이 아닌가 싶을 만큼…. 그만큼 60년 세월을 느끼지 못하겠어요. 강산이 여섯 번 바뀐 세월인데, 너무 빨리 지나간 듯 싶습니다.”

예의 그 환한 웃음이었다. “찾아오기 어렵지 않았어요?”라며 트레이드마크인 얼굴 전체의 함박웃음으로 기자를 맞이한 두봉(杜峰·프랑스명 르네 뒤 퐁) 주교는 밭일에서 막 돌아온 듯, 편한 차림이었다.

두봉 주교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경북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 586-1. 일명 ‘의성 문화마을’이다. 문화마을 사업은 농어촌 환경 정비 사업 일환으로 90년대부터 정부가 추진했다고 한다. ‘의성’ 톨게이트에서 5~10분 거리에 조성된 70호 규모의 잘 정돈된 마을이었다. 두봉 주교가 살고 있는 곳은 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다. 1990년 안동교구장 퇴임 이후 의정부교구 행주공소에서 머물다가 현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의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겠냐”는 ‘귀향’ 요청에 2004년 11월부터 살고 있는 곳이다.

기자가 집에 들어서 텃밭을 궁금해 하자 두봉 주교는 밀짚모자를 쓴 채 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고구마, 땅콩, 가지, 토마토, 고추, 상추가 심어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100평 남짓한 크기의 텃밭에는 싱싱한 모습으로 고추가 줄지어 매달려 있었고 토마토는 아직 초록 빛을 띤 채 영글어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두봉 주교는 하루 1시간 정도 그렇게 텃밭을 가꾼다고 했다.

다시 옷을 고쳐 입고 자리를 마주하면서 사제서품 60주년 축하 인사를 건네자 “매년 주교 서품 기념일에는 교구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 정도 였는데 금년이 60주년이기에 일이 조금 커진 것 같다”고 계면쩍어 했다.

“교계 언론에 성직자들이 많이 등장하잖아요. 제 이야기가 나타나서 교우들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부담을 주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거든요. 조용히 서품 기념일을 보내고 싶은 마음 이었어요.”

인터뷰 일정으로 연락을 취했을 때 마뜩잖아 하던 이유를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만났으니 인터뷰에 필요한 것 다 해 줄게요 하하하.” 취재진의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맑고 호탕한 웃음이었다.

“한국 나이로는 85세”라고 소개한 두봉 주교는 “사는 것이 참 기쁘다”고 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건강도 나쁘지 않고 강의 피정 등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축복”이라는 두봉 주교는 “사는 자체가 재미있고 오늘 이시간이 행복이고 고맙다”고 했다.


 
▲ 두봉 주교는 신앙은 희망의 모습이며, 힘있고 떳떳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임을 강조했다.
 

한국 농민사목의 대부

1953년 사제품을 받은 두봉 주교는 그 이듬해 한국에 왔다. 25살 약관의 나이였다. 그만큼 그의 60년 사제 생활이란 곧 ‘한국에서의 삶’과도 같은 의미다.

당시 폐허만 눈에 띄던 서울, 용산 성심여고에 자리 잡았던 파리외방전교회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대전교구 대흥동본당 보좌신부로 한국교회에서의 사목 생활 첫 발을 내디뎠다. ‘두봉’이란 이름은 그때 대흥동본당 주임이었던 고 오기선 신부로부터 얻은 것이다.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라는 뜻. 12년 동안 대전교구에서 활동했던 두봉 주교는 1969년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후 안동교구민과 함께 22년의 세월을 보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가져요. 그냥 주욱 이렇게 살아오고 지내온 여정이….”

두봉 주교의 안동교구장 이력에서는 박정희 정권시절 부조리한 정권에 항의하며 교구민이 하나가 돼 불의에 결연히 맞섰던 일,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던 교구를 위해 미국을 비롯, 독일, 네덜란드 등 해외교회를 돌아다니며 도움을 청했던 일, 안동에 처음으로 문화회관을 지어 지역 사회에 개방한 일, 당시로서는 국내 최초 전문대학인 가톨릭상지대학 등을 설립한 일, 매년 신앙대회를 개최하고 ‘공소사목’ 소식지를 창간했던 일 등이 찾아진다. 그 시간들 속에서 두봉 주교는 ‘한국 농민사목의 대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제’로 산다는 것

사제생활 60주년을 맞아 두봉 주교에게 ‘사제’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부르심, ‘성소’죠. 주님께서 그렇게 부르셨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이거든요. 부족하지만 60년 동안 예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면서 여러 사람에게 기쁨의 모습을, 행복의 모습을 주고 힘을 주면서 살고 있죠. 내 안에서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 일을 하셨다는게 너무 고마워요. 저는 그저 ‘예’ 했을 뿐이예요.”

“사제로 살았던 60년의 시간 속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 ‘사제서품식을 거행할 때’ 참 보람을 느꼈다”는 두봉 주교는 “한편 고해성사 등을 통해 혹은 사목 현장에서 어려운 사람들의 삶의 아픔·힘듦을 목격할 때 함께 ‘가슴 아픔’의 느낌을 가진다”고 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같이 웃고 슬픈 일에 같이 슬퍼하는” 그런 시간이었다고.

“그런 가운데 실의에 빠지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쁨과 희망, 행복을 주시는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에게 그런 긍정적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두봉 주교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특별히 자랑할 만한 것을 가진 것이 없음에도 그 평범함을 통해 주님께서 많은 일을 하신 것이 뜻밖이라고 했다.

“분명 내 힘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 없으면 힘없는 사람이예요.”(웃음)

서품 60년차 대선배로서 후배 사제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없을까. “사제들이 정기적으로 만나서 영적인 깊은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전과 다르게 현대 사회 안에서 사제들의 영성을 위협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풍부한 영성생활을 하려면 사제들끼리 영성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나눔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마음의 가난

두봉 주교는 자주 ‘가난’의 영성을 이야기 한다. ‘이 시대의 가난한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 물었더니, ‘마음의 가난’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계획할 것도 특별히 좋아할 것도 싫어할 것도 없는 ‘빈 마음’의 상태”라고 설명했다.

“요즘 염려되는 것은 ‘돈’, 물질주의예요. 사회 분위기도 마치 ‘돈’과 행복은 동급이라고 부추기는 듯 하죠. 세상 안에 있는 교회도 가난이라는 척도에서 볼 때 염려스러운 점이 많은 듯 합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참으로 물질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가



가톨릭신문  201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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