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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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이 만난 사람] 대전 성심당 임영진 대표

“빵 하나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을 꿈꿉니다”/ 1956년 부친 때부터 이어온 가업/ 가톨릭 정신 바탕으로 한, 나눔 속에서 기업 ‘사명’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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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김신혜 기자 cella@catimes.kr)
 
 
대전 중구 은행동 145번지에 위치한 ‘성심당(聖心堂)’은 1956년 대전역 앞 작은 찐빵집에서 싹을 틔워 57년째 대전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른바 ‘동네빵집’이다. 그런데 이 동네 빵집이 대한민국 제과업계를 대표하는 ‘전국구 빵집’으로 부상하고 있다.

2011년에는 미슐랭 가이드에 국내 제과업체 최초로 이름을 올렸고, 현재 단일매장으로서는 가장 많은 빵 종류가 진열되는,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프랜차이즈 빵집들의 거센 공세 속에서 지역 빵집의 막강한 브랜드 파워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임영진(요셉·61·대전 대흥동본당) 대표 인터뷰를 위해 성심당을 찾은 날, 추적추적 초가을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그의 빵집은 고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한가득씩 쟁반에 빵을 담은 손님들이 계산대 앞에서 길게 줄을 서고 있는 모습이었다. 교복을 입은 10대들부터 어르신들까지 연령층도 다양했다. 개중에는 빵을 열심히 고르고 있는 외국인들도 보였다. 인기 폭발이라 할 수 있는 즉석빵 튀김 소보루 코너 역시 많은 이들이 몰려있었다.

대만에서 왔다는 한 여성은 “일주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는데, 대전에 가면 꼭 성심당을 가봐야 한다고 해서 방문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성심당의 인기에는 ‘빵맛’ 뿐만 아니라 빵을 통한 ‘사랑 나눔’의 스토리가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57년 전 처음 빵집을 열었을 때부터 날마다 영업 후 남은 빵을 고아원·양로원 등에 나누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매일 한결같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정성스런 빵맛에 타인을 위한 베푸는 철학이 더해져 성심당은 자연스럽게 지역을 초월한 전국적인 명품 제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임 대표는 푸근하고 넉넉한, 동그란 인상이었다. 흔히 연상하는 전형적인 ‘빵집 아저씨’ 분위기를 풍겼다. 먼저 57주년을 맞는 소감을 물었다.

“감사할 뿐이죠. 지역민들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오래된 기업으로 믿고 인정해 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그런 자리에는 분명 인간적인 노력을 넘어선 하느님의 도움이 있었다고 봅니다.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대전역 찐빵집

성심당 창업주인 부친 고(故) 임길순(암브로시오·1997년 작고)씨는 함경북도 함주 출신이었다. 1·4 후퇴 때 가족을 이끌고 함흥부두에서 가까스로 배를 얻어 타고 남한으로 탈출했다. 미군들의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 임씨 가족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묵주’ 덕분이었다고 한다. 죽음의 고비마다 ‘묵주’가 북한군 스파이가 아님을 증명하는 징표가 되어 살아서 월남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때부터 남은 생은 ‘덤’이라고 생각하셨죠. 죽을 뻔한 인생을 하느님께서 살려주셨으니 살아있는 동안은 남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약속을 하신 듯 해요. 월남 후 대전역 한 켠 3평(약 10㎡)짜리 공간에서 찐빵장사를 하셨는데 그때부터 빵 나눠주기가 시작됐습니다.”

부친은 그날 판매하지 못한 찐빵을 이웃들에게 그냥 나눠줬다. 밀가루가 귀한 시기라 남은 것을 다음날 다시 쪄서 팔아도 됐지만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일부러 넉넉히 찐빵을 더 만들게 했다고 한다. 찐빵 재료를 사야 하고 외상값을 갚아야 하는 돈으로 ‘없는’ 이웃들에게 끼니와 필요한 것들을 챙겨줬다. 7남매를 거느린 가장으로 넉넉지 않은 상황이니 ‘몸’으로 돕는 경우도 많았다. 연령회 활동을 통해 염(殮)을 맡아 봉사하기도 했다.

“죽을 고비 속에서 하느님 은혜로 살아남았다”는 체험을 했던 대로 신앙도 ‘무조건’이었다. 미사에 빠지면 회초리가 가해질 만큼 임 대표는 혹독하게 신앙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1970년 대흥동 주교좌성당 앞으로 빵집을 옮겼는데, 당시 성당 주변은 허허벌판이어서 장사를 할 곳이 아니었죠. 주변 사람들이 다들 말릴 정도였어요. 그런데 부친이 이사를 한 이유는 단지 성당이 가깝다는 이유였어요. 아들·딸들이 성당 종소리를 듣고 기도를 할 수 있게 한다는 마음이셨죠.”

매일 저녁 한 시간 가까이 저녁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쳐야 했고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미사를 가야했던 그 시절에는 아버지와 신앙이 원망스러웠다는 임 대표. 그러나 지금은 그 ‘신앙’이 부친이 남겨준 ‘가장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 초창기 성심당의 모습.
 

계속되는 빵 나눔

신앙을 바탕으로 부친으로부터 임 대표에게 이어진 성심당은 아직도 ‘베풂’과 ‘너그러움’, ‘풍요로움’의 현재 진행형이다.

매일 400여 종 6000개 정도의 빵이 만들어지는데, 그 중 400~500개 정도가 50여 곳의 각종 복지시설에 나눠진다. 약속된 기부 장소에 보낼 빵이 모자라면 급하게 빵을 더 굽거나 떡을 찌기도 한다. 가격으로 치면 월 천만 원 정도의 금액이다.

그리고 매장에서는 하루 종일 시식 행사가 이어진다. 누구도 눈치 보지 않고 갖가지 빵을 맛볼 수 있다.

임 대표는 “주변에 푸



가톨릭신문  201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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