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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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선교 현장을 가다] <2> 초원에 싹트는 신앙

성전 생기자 신자들 하나둘 모여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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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 생기자 신자들 하나둘 모여들고
 



 
▲ 초원에 게르를 짓고 사는 가족을 방문한 김성현 신부가 유목민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집이다!’

몽골 항올본당에 도착한 김성현 신부는 제일 먼저 성모당을 찾아 성모님께 인사를 올렸다. ‘어머니, 잘 다녀왔습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 한 달여의 모금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김 신부를 예비신학생 산자와 몽골인 선교사 자야가 반갑게 맞는다.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된 산자는 김 신부가 처음 울란바토르에 와 함께 기도하던 아이들 중 하나다. 김 신부가 몽골지목구장 웬체슬라오 S. 파딜랴(Wenceslao S. Padilla) 주교의 명에 따라 항올본당 설립 임무를 맡았던 2001년 신자도 선교사도 성전 건립기금도 하나 없던 시절, 김 신부는 자신의 곁으로 모여든 아이들의 눈망울에 희망을 심었다. 몽골인들의 집집마다 찾아가 문을 두드리지도, 선교 책자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김 신부에게 왔다.

“자야, 졸라, 수산나, 산자, 아자, 비, 어귀, 둡칭, 타우가, 바타, 바이라, 호따, 타우린…. 그 아이들이 어디서부턴가 찾아왔어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아이들이죠. 야르막(몽골 항올본당 관할 내 공소 중 하나)에 모여 함께 기도했지요. 아무것도 없던 시절, 그 아이들에게 신앙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초원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천막집을 짓고 사는 몽골인과 함께 벽돌로 된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신자라고는 십여 명의 아이들이 전부가 아닌가. 김 신부는 아이들과 함께 항올본당 설립을 위한 묵주기도 8만단 바치기를 시작했다.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성전을 건립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졌다.

“1단을 바치면 1달러를 모을 수 있을 거야. 우리 함께 기도하자.”

아이들은 조막만한 손으로 묵주알을 굴렸다. 아이들의 신앙심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김 신부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어려울 때마다 찾게 되는 신자들, 고맙게도 한국의 신자들은 언제나 김 신부의 편이었다.

“처음 지어진 몽골 항올성당은 모두 신자분들의 후원금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저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담아주셨습니다. 그 후원금으로 땅도 사고, 건물도 지었습니다. 예비신학생 기숙사도 만들었습니다. 힘들게 살아가던 아이들이 성당에서 지내며 사제를 꿈꿀 수 있게 됐습니다.”

든든한 후원금을 안고 돌아왔던 김 신부는 2001년 9월 초, 성당 터를 보기 위해 산에 올랐다. 앞으로 나무가 많은 공원이 있던 지금의 항올본당 자리, 그 곳을 바라보며 김 신부는 신앙의 꿈을 심었었다.

‘성전을 지어놓으면 하느님께서 채워주시겠지…. 신자들이 저 공원을 거닐며 기도하겠지…. 모든 걸 하느님이 마련해주시겠지….’

하느님께서는 성전도, 신자도, 선교사도 모두 마련해 주셨다. 2002년 8월 15일, 몽골 항올성모승천본당을 하느님께 봉헌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후 거짓말처럼 선교사들이 찾아왔다. 폴란드 평신도 선교사 부부 라프와 고샤였다. 김 신부는 무릎을 쳤다. 신자들도, 예비신자도, 선교사도 하나둘 항올본당으로 모였다.

몽골본당 사목,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홀로 해야 하는 번역 작업이 많았다. 미사 경본은 마련돼 있었지만 본기도와 그날그날의 기도문들은 급조해 만들어야 했다. 혼배성사를 위한 혼인 예절서, 장례미사를 위한 연도문부터 시작해 주일학교 아이들 출석부까지 하나하나 김 신부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불을 밝히고 앉아 번역 작업을 하고 있으면, 창문 밖으로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예수스 크리스테 예수스 크리스테(예수 그리스도)’하며 돌을 던지고 가기도 했다. 모든 것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김 신부는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 애썼다. 성가책이라고 해야 A4 파일에 프린트한 악보를 끼우는 것이 전부였지만, 매일 미사도 모두 창 미사로 봉헌했다. 부활 자정 미사도 밤 10시에 시작해 새벽 1시에 마쳤다. 생략할 수 있는 것도 되도록 생략하지 않았다. 몽골 신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미사 봉헌금을 낼 수 있도록 헌금 봉투도 마련했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마음’을 적어 봉투에 넣도록 했다. 하느님께 소중한 무엇인가를 봉헌하는 마음을 알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몽골신자들이 내는 50~100투르그(1투르그≒1원) 꼬깃꼬깃한 돈들이 모여들었다. 1주일 통틀어 봐야 몽골신자들이 내는 헌금액은 2~3만 투르그에 불과하다. 그 돈들을 투명테이프로 정성스레 붙여 공동체 전체가 먹는 빵을 사는데 썼다.

“몽골 물가는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데, 소득 수준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의사나 대학교수 등 소위 엘리트 그룹의 한 달 소득이 20~30만 투르그입니다. 한 달 8~9만원의 보조금으로 10명의 식구가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보다 못한 하층의 경우에는 쓰레기나 병을 줍거나, 기차에서 떨어지는 석탄을 주우러 다녀요. 기차에서 석탄이 떨어지지 않으면 기차에 올라타 석탄을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다 사고가 나 죽기도 했고…. 그런 신자들이 하느님께



가톨릭신문  200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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