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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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인터뷰] 「인생사용설명서」 전파하는 베스트셀러작가 김홍신

“미움·좌절·고통… 마음만 슬쩍 바꾸면 버릴 수 있어”/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자꾸 잊어버리니 문제지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되새기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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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실천문학운동에 시민운동을 펼쳐왔던 김홍신 작가.
그에게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강단있는 모습이 여전히 묻어난다.
 

켜켜이 쌓인 소설, 수필, 평전, 논문…까지는 이해가 됐다. 만화책에 눈길이 머물자 사실 좀 의아했다. 한켠에 가득히 쌓여있는 만화책의 정체에 대해선 좀 있다 질문하자 싶었다.

강연 때마다 딱 떨어지는 정장 차림의 신사만을 만나왔다. 덕분에 이웃집 아저씨 같이 소탈하게 마주앉아 시종일관 다양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김홍신(리노·64) 작가의 모습에 적응하는데 몇 분쯤 걸린 듯하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연방 펜을 끄적여대는 메모지는 이면지는 물론이고 우편물까지 오려 만든 것이었다. 준비해둔 질문들을 저만치 밀어놓고 사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게 됐다.

“제가 살면서 나무를 너무 많이 죽였어요. 종이를 참 많이도 소비하고 있으니…. 반성하는 차원에서 어떤 종이도 귀퉁이 한점 남김없이 쓰려고 노력합니다.”

400자 원고지에 그 몇 곱절의 글자 수가 채워져 있었다. 쓰긴 써야겠는데, 종이를 아끼는 방법은 한 장에 많은 글자를 쓰는 것이어서 어쩔 수가 없단다. 그 노력은 말릴 수가 없겠다. 수없이 많은 종이로 책을 내는 일, 베스트셀러 작가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숙명과도 같으니 말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모습, 과거 실천문학운동에 시민운동을 펼쳐왔던 강단있는 모습이 여전히 묻어난다. 입으로만 ‘정의’를 외치는 게 아니라 더불어 누리는 정의를 찾아 허리 꼿꼿이 세우던 작가였다. 이번 가톨릭인터뷰에서는 그가 말하는 인생 사용 설명서를 한 번 들여다볼까 한다. 그는 살맛나는 세상은 나만 잘 사는 곳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 살맛나는 세상을 가꿀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다독인다.

“그냥 선생이라고 불러주시오”

1976년 ‘현대문학’등단, 소설 「인간시장」을 세상에 내놓으며 한국 역사상 최초의 밀리언셀러 소설가가 됐다. 1980년대 실천문학운동에 뛰어들어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 매달렸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시민운동 대표로 나서다 국회의원이 됐다. 헌정 사상 유례없는 8년 연속 의정평가 1등 국회의원(제15·16대)이라는 타이틀까지 덧붙였다. 국회를 떠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3년간 두문불출, 역작 「김홍신의 대발해」를 완성해냈다. 등단 이후 130여 권의 책을 출간하며 다양한 문학상을 휩쓸어왔다. 현재는 박사에 석좌교수 직위까지 얹었다. 게다가 매주 전국 각지에서 2~3건의 강연을 이어가는 인기강사다. 덕분에 불리는 직위만도 열손가락을 넘어선다.

그래도 그는 그저 ‘작가 선생’이 좋단다. 그 바람은 진심으로 봐도 좋겠다. 19살 청년 시절에 쥔 펜은 여전히 그의 손에 꽉 쥐어져 있으니.

“사용법은 복잡하지 않아요”

수많은 이들에게 먼저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랑은 왜 변하는가’…. 이 질문들은 먼저 김 작가 자신의 문제가 됐고, 치열하게 해답을 찾아 함께 고민했다.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쾌락과 행복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과 자꾸 비교하고 열등의식을 만들어내면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자꾸 잊어버리니 문제지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되새기고 노력해야 합니다.”

앞선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렇게 말하는 자기 자신도 잘 못산다고 토로한다. 예를 들어 지난해, 지하실에 물이 새어들어 만 권 이상의 책들이 빗물에 널브러진 것을 보자 화를 안 낼 재간이 없었단다. 마음다스리기를 지속했다. “그래도 집이라도 가졌으니, 비라도 새지”, “도서관에 가면 책은 얼마든지 있는 걸”…. 마음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치밀어오는 화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저 견딜 만하다는 것이지요. 하느님 곁에 가는 그 순간까지 계속 연습하고 노력해야겠지요.”

남들이 그를 볼 때는 ‘저 정도 되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 작가의 대답은 ‘No’였다.

“문득문득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더 했어야 했는데, 더 이뤘어야 했는데…. 그런데 저의 스승께서 딱 세마디를 해주시더군요. ‘쥐는 쥐약인 걸 모르고 먹는데, 사람은 쥐약인 줄 알고서도 먹는다’, ‘그렇게 많이 가졌는데 쓸데없는 걸 또 가지려 한다”, ‘뜨거운 잔은 내려놓으면 되는데 왜 두 손으로 꼭 쥐고서 안달하느냐’라는 말씀을 듣고 그 순간부터 당장 37년9개월간 피우던 쥐약같은 담배부터 딱 끊었습니다.”

“만화로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됐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고 한다. 무릎을 탁 칠 일이 떠올랐다. 김 작가는 자신이 어릴 적 다니던 논산본당 주임이었던 프랑스인 신부님께서 보여주신 만화책 덕분에 책 읽는 맛을 알았다고 토로한다. 어린이들을 위한 교재며 교구가 너무 부족하자, 프랑스에서 만화책을 구해다 직접 번역해 만든 책이었다. 이후 그는 날마다 책과 더욱 친해졌다. 요즘에도 머리가 묵직하거나, 예전에 읽었던 책에 다시 손이 가지 않을 때는 만화로 된 책을 한껏 쌓아두고 읽는다. 최근에도 삼국유사, 삼국사기, 논어 등을 만화로 신나게 읽고 있다.

가톨릭의과대학에 떨어져 재수를 하던 시절, 김 작가는 그 1년 동안 단편소설 7편을 썼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건국대 국문학과도 20명 정원 중 21등, 미등록자 덕분에 추가로 합격했다.

하지만 곧바로 ‘스타 작가’가 됐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현대문학으로 등단, 작가로서의 역량도 인정받았다. 그 시절 그는, 작가는 휴머니즘과 사랑, 아름다운 가치만 그려내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갚을 길이 없습니다”

작가로서의 꿈과 그가 맞닥뜨린 현실과의 괴리는 너무나 컸다. 등단 직후, 그는 당시 유명한 칼럼이었던 조선일보 ‘젊은이의 발언’을 통해 문단의 폐해와 대선배들의 친일행각 등을 꼬집었다. 이후 오랫동안 한국문인협회에는 발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장편소설 「인간시장」을 쓰면서 온갖 협박과 공갈, 구속의 위협에 시달려왔다. ‘건방지다’, ‘고분고분하지 않다’, ‘어디서 함부로…’ 등의 말은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정의가 아닌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언제부턴가 책을 읽으면 감동어린 편지를 보내주는 이들, 거리에 나서면 다가와 고마움을 표하는 이들, 식당에 가면 주문하지도 않은 음식을 대접하는 이들, 밥값을 대신 내고



가톨릭신문  2011-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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