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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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문화] 생명, 다르게 보기 ③조바심이 생명력을 갉아 먹는다.

''각자의 때''가 만드는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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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순 박사(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작년 가을 제주도 여행길에서 마른 쑥의 향이 너무 깊고 그윽해서 씨앗을 몇 톨 받아왔다. 봄이 되자 화분에 씨앗을 심고 정성껏 물을 주었지만 2~3주가 지나도록 싹이 틀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조바심이 나서 흙을 파헤쳐보고 싶었지만 발묘조장(拔苗助長)으로 농사를 망친 송나라 사람 이야기가 생각나서 그만두었다. 발묘조장은 「맹자」(공손추 편)에 나오는 얘기다. 어느 날 송나라 사람이 집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하루 종일 싹이 자라도록 도와주었더니 피곤해 죽겠다`고 했다. 어떻게 도와주었는지 아들이 달려가 보니 싹은 이미 모두 말라 죽어 있었다. 빨리 자라라고 싹들을 모두 쑥쑥 뽑아 올려주었던 것이다.

 그는 왜 멀쩡한 싹을 뽑아 올려 죽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경쟁심에서 비롯된 조바심 때문이다. 남의 집에 비해 자신의 것이 더디 자라는 것 같아 안달이 나서 도와준 것이 결국 싹들을 모두 처참하게 죽인 것이다. 맹자는 천하 사람들 가운데 이처럼 조장하지 않는 이가 드물다고 한탄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배가 고프다고 쌀을 끓이지 않고 밥을 지을 수 없고, 아무리 춥고 힘들어도 겨울을 나지 않고서는 봄이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장하면 송나라 사람처럼 일을 망친다. 그는 단지 일 년 농사를 그르쳤을 뿐이지만 잘못된 교육관, 잘못된 가치관, 잘못된 경쟁심은 한 사람의 인생을 그르치고, 한 나라의 문화를 그르치고, 한 민족의 역사를 망친다. 경쟁 구도 속에서 살아남자고 시도한 발묘조장이 결국 생명력만 갉아먹을 뿐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열심히 일하는 한 디자이너가 있었다. 그는 자기 분야에서 경력을 갖춘 실력자였는데, 어느 날 후배가 그를 제치고 앞서 승진을 했다. 주변 사람들의 위로에도 잘 나가는 후배를 볼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굴욕적인 기분이 들어 회사 생활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도 아니어서 곰곰이 생각하다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졸업장이 필요했을 뿐, 공부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중용」의 시중(時中) 사상에 대해 강의를 듣게 되었다. 시중은 때에 딱 들어맞게 행위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지만 꽃들은 시중을 잘 따른다. 봄꽃이 만발하면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에게로 휩쓸려간다. 이때 제철이 아니어서 어차피 피지 못하는 가을꽃들이 경쟁심을 느껴 조바심한다면 스트레스만 가중돼서 건강하게 자랄 수 없을 것이고, 정작 가을이 와도 영양실조 상태에서 제대로 피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실 가을꽃이 빚어내는 깊이와 기품은 봄꽃의 화사함이 결코 따를 수 없는 또 다른 경지다. 그는 강의를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가을에 피는 꽃이었을지도 몰라.` 그는 자신이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아름다운 가을꽃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로 한순간 한순간을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세상 만물에는 저마다 다 때가 있는데, 꽃들이 각자 제철에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는 것은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고 시중을 따랐기 때문이다. 가령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는 수양버들과 가을의 주인공인 단풍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화창한 봄날, 수양버들이 연록색의 반짝이는 잎과 휘늘어진 가지로 자태를 뽐내면 사람들의 눈길은 모두 그에게로 향한다. 바로 옆에 서 있는 단풍나무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존재감도 없이 묵묵히 무명의 시간을 견디다 가을이 오면, 이번에는 단풍나무가 주변을 집어삼킬 듯 붉게 타오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서러운 봄을 지내고 뜨거운 뙤약볕을 견디며 내실을 키워온 덕분이다. 노랑과 빨강으로 수놓으며 단풍나무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때, 물기 없이 바짝 말라 시들어버린 수양버들은 또 얼마나 추하고 초췌한 모습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을 아름답다 추하다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일 따름이다. 모든 것이 다 때에 맞게 운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남보다 먼저 승진하는 것이 결코 더 좋은 일도 아니고 승진에서 밀린다고 불행한 일도 아니다. 정말 불행한 일은 제철이 왔는데 정작 준비가 되지 않아 꽃피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자신을 믿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조바심내지 않으면서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꽃인지, 언제 피는 꽃인지 알게 되면 더 이상 생명력을 손상시키지 않고 타고난 아름다움을 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조바심하면 자기는 물론이고 타인의 생명력도 위축시킨다는 사실을 잊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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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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