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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문화] 생명, 다르게보기 ④숨을 곳 없는 공간구조, 생명력을 위축시킨다

비움의 소통, 생명문화 만들어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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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순(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일본 여행을 할 때 일본 제일의 명성이라 불리는 고성을 방문했는데, 건물에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건물 외관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될 정도로 아름답고 독특했지만 내부는 소라껍질 속처럼 구불구불 이어지는 미로와 같은 계단을 통해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창문이 모두 막힌 밀폐된 구조였기 때문이다. 철저한 방어와 동시에 바깥 세계와 차단된 상태에서 오직 성주의 뜻에만 집중하게 하는 당시의 정치 의도를 엿보게 했다. 성주의 눈에 일거수일투족이 통제되고 있다는 느낌이 마치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1975년)에 나오는 원형감옥(panopticon)을 연상하게 했다.

 요즘 신축 건물들은 대부분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현대인들은 고층 빌딩에 갇혀 들뢰즈가 우려한 `통제사회`를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자유로운 발상과 창의적인 연구가 필요한 곳, 대학 건물을 살펴보자.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쭉 늘어선 연구실들, 창문이 모두 여닫이로 돼 있어서 바깥바람조차 시원스레 끌어들일 수 없다. 바람이라도 쐬고 싶어 밖으로 나가려면 승강기를 타고 로비층까지 내려가야 한다. 이렇게 출입구가 멀고 번거로워서 점심시간 이외에는 스스로 출입을 자제하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현대식 상업건축이 노리는 효과인지도 모르겠다. 출입구를 극소화함으로써 스스로 바깥세계와 소통을 단절하고 독립된 공간 속에 자신을 가두고 일에 몰두하게끔 길들이는 것 말이다. 오늘날의 추세는 각자의 공간에 묻혀 사이버공간에서 익명의 얼굴로만 소통하고 면대면의 소통은 최소화되어 가고 있다. 이처럼 제한된 출입구는 불통의 시대를 상징하는 매개물이다. 건물은 생각의 반영이다.

 「주역」(계사하전)에서는 불통이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경고하고 있다. 불통은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말로, 옹(壅)자로 표현되고, `흐름의 정지 상태`, `생명의 정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사실 들숨날숨도 결국은 소통의 한 현상이고 보면 소통은 만물의 숨쉬기라 할 수 있다. 숨 쉴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문과 비어 있음이다. 생명의 흐름에는 반드시 출입구가 필요하고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통로가 훤히 뚫려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제한된 출입구와 빈 공간이 없는 현대식 건물은 자기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출입구는 외부세계와 내부세계가 자유롭게 소통하는 통로이며 생명의 흐름을 장악하고 있는 곳이다. 문이 없는 건물을 생각만 해도 숨이 탁 막히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견고하고 아름다워도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숨 쉬지 못하는 건물은 그 속에 사는 것만으로도 생명력이 고갈될 것 같다. 최근 건축상을 수상한 어떤 건축가는 이런 점을 잘 포착해서 한 건물에 출입구를 무려 20여나 설계했다고 한다. 그는 출입문을 많이 설치해서 건물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숨 쉬는 빌딩, 바람이 잘 통하고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집을 지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쾌적하고 즐거운 삶을 선사했다. 생각의 전환이 가져온 선물이다.

 노자철학에서 문은 만물이 들락거리는 도(道)의 상징이다. 도가 실현되는 세상은 곧 소통이 잘 되는 사회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원활한 소통, 활발한 교류, 새로운 생명문화 생성,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회다. 생명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소통은 필요불가결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물에 출입구가 많아져야 하고, 빈 공간도 늘어나야 한다. 또한 우리 자신도 채우려 하기보다 비워야 다른 사람과 소통이 원활해지고 생명력이 증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에서 불통은 자신을 비우지 못하고 서로 자기 신념만 강요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변화의 세계에서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통할 수 없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자기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으면 남의 입장이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소통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때 소통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자기를 텅 비우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다. 이것이 장자가 제안하는 소통의 방법, `오상아`, 즉 `자기 비움`이다. 예를 들어 퉁소의 아름다운 소리는 곧 `자기 비움`에서 나온다. 퉁소 소리는 퉁소가 자기를 텅 비우고 있을 때 우주의 바람이 지나며 나는 소리라고 장자는 말한다. 그래서 퉁소의 `자기 비움`은 퉁소가 우주와 소통하는 방법이며, 퉁소의 퉁소됨을 실현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을 텅 비워 우주의 바람이 지나가는 통로가 되면, 그것이 생명을 아름답게 보전하고 가치 있게 실현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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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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