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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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문화] 생명, 다르게 보기-⑤남의 이목에 생명을 팔다<끝>

남의 시선 의식하면 노예적 삶 살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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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순 박사(서강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갑시다` 마지막 필진으로 참여해 지금까지 생명력을 약화시키고 고갈시키는 사회현상에 대해서 `생명, 다르게 보기`를 연재해왔다. 생명문화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물론 개개인이지만 사회의 철학적 기반이 약하면 생명문화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사회구조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 분석은 필수적이다. 지금까지는 1. 스펙 위주의 지식 쌓기 비판 2. 상대를 옥죄는 자기중심적 사랑에 대한 반성 3. 생명력을 위축시키는 조바심 4. 통제성이 강화된 건축구조가 주는 숨 막힘 등에 대해서 이야기해왔다. 이제 자신의 삶을 남의 이목에 팔고 노예처럼 살아가는 소유론적 욕망을 끝으로 이번 연재를 마치려 한다.

 최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자살의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상대적 박탈감이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말이 있다. 자살의 원인이 생존에 필요한 절대적 자원 부족이 아닌 상대적 박탈감 혹은 스트레스, 우울증이라는 사실이 우리 시대의 소유론적 삶을 대변해준다. `배고픔`과 `배아픔`은 질적으로 다르다. 사람이 굶고는 살 수 없으니 배고픔은 `존재론적 욕망`의 결핍이다. 그러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할 때 배아픔은 `소유론적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이다. 배고픔은 한 끼 식사면 해결되겠지만 배아픔의 문제는 마음을 비우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읽은 한 탈북여성의 인터뷰 기사는 소유론에 치우친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북한에서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기를 쓰고 살려고 했는데 남한에 오니 먹을 것이 풍족한데도 살고 싶지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자라 해도 하루 세 끼 이상을 먹을 수는 없다. 존재론적 욕망을 채우는 데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지만 그가 누리는 소유물에서는 드러난다. 작년에 한 국회위원은 1억 원대의 피부 관리를 받았다고 해서 언론의 호된 매질을 당한 적이 있다. 일부 계층에서 피부는 이미 골격을 감싸고 있는 외피가 아니라 신분과 지위의 바로미터다. 애기처럼 맑고 투명한 피부는 바로 부의 상징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남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소유물과 외모에 치중된 나머지 인생, 죽음과 같은 존재론적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곧장 생명경시 풍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 12장에서 눈을 위하지 말고 배를 위하라고 한다. 눈은 생명력을 약화시키고 소멸시키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오색은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먹게 하고, 오미는 사람의 입맛을 어긋나게 하고, 말달리고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동을 방해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여기서 노자가 배에 주목하는 이유는 거기에 생명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생명을 지키는 길은 배를 채우는 데 있지, 눈과 귀와 미각을 즐겁게 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배의 욕망보다 눈의 욕망을 중시하는 이유는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다. 하지만 배보다 눈의 욕망에 관심이 집중되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노예적으로 살게 된다.

 「논어」(헌문편)에서도 노예적 삶에 빠지는 이유가 남의 이목에 신경 쓰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옛날 학생들은 자신의 심성을 밝히기 위의서 배웠지만[위기지학,爲己之學], 오늘날 학생들은 남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배운다[위인지학,爲人之學]." 이 말은 진정한 공부가 자신의 심성, 도덕성, 인격, 품격을 계발해서 존재 자체로 인정받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를 무시하고 출세 지향적 공부, 남의 이목을 끄는 공부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한탄한 것이다. 공자가 보기에 전자는 사람들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지만 후자는 평생 남의 평가에 연연하느라 편할 새가 없는 불행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다. 출세해서 권력과 부를 움켜쥐면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지만 그들은 가진 것을 잃는 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줄타기의 대상, 도구적 인간이 될 뿐이다. 그러니 소유를 통해 자아를 실현한다는 생각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따라서 우리가 `노예적 삶`에서 벗어나 자신 있고 당당하게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심성을 밝히는 공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생명문화를 이룩하는 기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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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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