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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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칙 생명의 복음, 그 영원한 울림]<25> 생명의 봉사 편견없이 행해야

어느 때보다 죽음의 문화 우세, 만연한 현실.... 생명의 모든 단계, 상황에서 일관성 있게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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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봉사자 : 죽음의 문화는 강해지고 생명의 문화는 약해지는데, 어떻게 나서야 할까요? 저희 생명수호 봉사자의 존재도 사실은 미미하거든요.

 할 수 있을 만큼 하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4)고 이미 예언하신 바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은 단순합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바로 `사랑의 계명`, 그것 말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오늘날처럼 물질주의적 사고, 특히 <<윤리적 상대주의>>(70항 §1)가 확산되기 이전에도 나약한 모든 생명이 잘 수호됐거나 충분히 봉사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찍이 오늘날처럼 법의 가면을 쓰고 국가적으로,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 죽음의 문화를 확산시킨 적 또한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는 호소하십니다. < >(87항 §1).

 이 `사랑의 봉사`는 생명의 모든 단계와 모든 상황 속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행해져야 합니다. 특정한 봉사는 편견이며 차별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관련된 곳에서는 사랑의 봉사가 반드시 심오한 일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생명은 모든 단계, 모든 상황 속에서 신성하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편견과 차별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리할 수 없는 선입니다>>(87항 §3).
 

 나가며

 위령성월을 막 보내고 대림시기를 맞는 가운데 종종 인용하는 탈무드의 유명한 교훈, 조금은 긴 비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젊은이가 갑자기 임금님의 부르심을 받아 급히 궁궐로 가게 되었습니다. 걱정되고 두려웠기에 가장 친한 친구에게 함께 동반해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동반해 줄 것으로 믿었던 그 친구 왈, "난 안 가네. 자네 혼자 가게." 목숨을 걸고 함께 우정을 나누지 않았느냐며 화를 내자 그 친구 왈, "자네가 나를 따라다닌 것이지, 내가 자네를 따른 것은 아니었네." 크게 배신감을 느끼고는 덜 친한 둘째 친구를 찾아가 청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나도 무서우니, 궁궐 문 앞에까지만 따라가 주겠네. 그 안에는 혼자 들어가게." 또 실망한 그는 할 수 없이 평소 이름 정도나 알고 있던 셋째 친구를 찾아가 청했습니다.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가! 내가 끝까지 동반해주겠네. 혹시 임금님 앞에서 처벌받을 일이 있으면 내가 변호해 주겠네." 마침내 그 젊은이는 셋째 친구와 함께 임금님 대궐을 향해 먼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비유 이야기인데, 임금님 부르심은 죽음이요 궁궐은 무덤입니다. 첫째 친구는 세상에서 쫓아 다닌 재물, 권력, 쾌락 등입니다. 죽는 순간 내게서 즉시 떠나가 버립니다. 둘째 친구는 가족과 친지입니다. 함께 죽어주지는 않고 그저 무덤까지만 동반해줄 뿐입니다. 셋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무덤 속만이 아니라 저승까지도 따라가서 심판 때 변호를 해줍니다. 한마디로 세상 떠날 때 가져갈 것은 `사랑의 봉사`뿐이라는 것이지요.

 ※<< >>는 「생명의 복음」 본문.


이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교육분과장, 가톨릭대 윤리신학 교수, 서울대교구 오류동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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