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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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지금-죽음을 준비합시다] (1) 죽음이란 무엇인가

유비무환, 죽음도 예외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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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서울 용산 성직자 묘지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의 부활을 믿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
평화신문 자료사진
 

   고대 철학자 플라톤에게 누가 `인생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플라톤은 `인생은 죽음 연습`이라도 대답했다. 인생과 죽음의 의미를 극명하게 드러낸 경우라고 하겠다.

 웰빙(well-being)을 넘어 웰다잉(well-dying)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잘 사는 것` 만큼 `잘 죽자`는 것이다. 뭐든 잘 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죽음 준비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죽음교육 관계자들은 `죽음 준비가 삶의 준비요, 잘 죽고자 할 때 잘 살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죽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죽음 준비 시리즈 `영원한 지금-죽음을 준비합시다`를 새로 시작한다. 연말까지 이어질 시리즈는 죽음의 의미를 시작으로 △죽음준비 교육의 필요성과 목표 △내세에 대한 믿음 △가톨릭과 다른 종교들의 사후관(死後觀) △죽음을 맞는 바람직한 자세 △유언장 작성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과 사전의료지시서 △호스피스 △명사들이 말하는 `죽음 준비` △죽음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과 영화 등을 다룬다.

 또 죽음 준비학교, 호스피스 병동, 연령회, 죽음 체험 피정 등 죽음 준비와 관련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함께 전할 예정이다. 이 시리즈가 죽음은 물론 인생에 대해 좀 더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죽음`
 참으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다. 매스컴을 통해 하루도 빠짐 없이 접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익숙하지만, 나 자신과 전혀 상관 없는 일로 여긴다는 점에서는 낯설기만 한 그 무엇이다. 그렇지만 죽음처럼 가깝고 확실한 것이 또 있을까. 오늘 아침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도 어제 밤에는 교통사고로 누가 죽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오늘은 본인이 같은 사고의 주인공이 될 줄은 상상도 못한 채 말이다.

 이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사고를 당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말한다. 물론 확률적으로는 그렇다. 그렇지만 그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다. 이 기사를 쓰는 기자도, 이 기사를 읽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그러한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죽음에 대해서 확실한 것부터 살펴보자. 먼저 우리는 모두 죽는다. 바꿔 말해 죽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제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었다 해도 죽음 앞에서는 평등했다. 결국엔 다 죽은 것이다. 내가 아는 주변의 모든 이들도 죽고, 사랑하는 자녀들도 언젠가는 죽는다.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애써 죽음을 외면하면서 살 뿐이다.

 또 죽는 데는 순서가 없다. 태어난 차례대로 죽는 게 아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통곡하는 부모가 어디 한둘인가. 태어난 순서대로 죽어야 합리적일 것 같은데, 죽음은 그렇게 합리적이지 못하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것도 죽음의 비극적 속성이다. 대체로 늙고 병들어 병원에서 죽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또한 욕심이다. 세상살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 재해, 온갖 사건사고, 젊은 나이에 불쑥 찾아온 불치병 등 인간의 자연 수명을 보장하지 못하는 복병들이 주위에 너무나 많다. 하늘이 내려준 수명을 다 채우고 잠든 상태에서 아무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극소수에게 주어진 축복일 뿐이다. 주위의 지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는지 되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린다. 그저 부정한 것으로만 여긴다. `죽음의 문화`라는 말 자체가 아주 최근에 와서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죽음을 기피할까.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이 자신의 존재를 무(無)로 돌려버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명을 지배하고 있는 과학적 세계관은 물질 이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에 토대를 둔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에 지배받을 때 `나`라는 존재를 썩어가는 시체로만 남겨두는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영혼이 남는다 해도 두렵기는 매한가지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죽음을 경험해본 이는 아무도 없다. 죽음은 한마디로 미지(未知)의 세계다. 죽어서 내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죽음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란 힘들다. 내세가 어떤 세상인지 안다면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지게 만들기에 또한 두렵다. 죽어서 다시 만난다는 확신이 있다면 모를까, 영원한 이별로 다가오는 죽음은 크나큰 고통일 뿐이다. 그리고 죽음은 같이 겪는 게 아니라 철저히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죽을 때 육체적 고통이 너무 심하면 어떻게 견딜 수 있나 하는 것도 큰 두려움이다.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겠다`며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임종환자들을 접하면 두려움은 배가된다. 죽음보다 죽는 과정을 더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2-35).

 하느님 나라가 언제, 어떻게 도래할지 모르니 항상 깨어 준비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죽음도 그렇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지 하느님만이 아신다.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은 죽음 또한 그렇게 깨어 준비해야 한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0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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