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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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지금-죽음을 준비합시다](5) 다른 종교들의 내세관

현세의 삶, 저 세상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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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세에 관한 가톨릭교회 가르침은 앞서 소개한 바 있다(9월 13일자 제1035호).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갖고 있는 이웃 종교들은 내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다종교 사회에서 다른 종교를 존중해야 하듯이 그 종교들의 내세관 역시 그리스도교와 다르다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표적 종교들의 내세관을 살펴본 뒤 이들의 각기 다른 내세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성찰해본다.

 ▨ 유교
 유교의 시조인 공자에게 제자가 "죽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아느냐"고 대답했다. 공자의 내세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대목이다. 한마디로 죽은 뒤의 일은 모른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이를 근거로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공자 시대 유학을 후대에 새롭게 정립한 신유학(성리학)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신유학에 따르면 천지만물은 음양과 오행이라는 기(氣)가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어서 기가 모임으로써 태어났다가 흩어짐으로써 죽는다.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남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흩어지고 만다. 흩어진 기는 다른 만물과 같이 자연으로 돌아간다. 결론적으로 내세는 없다는 것이 유교의 내세관이다. 유교의 영생은 자손을 통해 대를 이어가는 것이다. 유교가 자손에 집착하는 이유다.
 
 ▨ 불교
 "사람이 계절에 따라 헌 옷을 벗어 버리고 다른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죽음은 이 몸 속에 살고 있는 영혼이 낡은 몸뚱이를 벗어 버리고 다른 새 몸뚱이로 옮겨가는 것이다."(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 중에서)
 불교의 내세관은 불교의 원조격인 힌두교와 다르지 않다. 또 분명하다. 윤회한다는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이 힌두교와 불교의 내세관이다.
 다음 생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느냐는 것은 이번 생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착하게 살면 좋은 모습으로 태어나고, 악하게 살면 나쁜 모습으로 태어난다. 꼭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현재 삶을 올바로 살지 못하면 짐승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착한 업을 쌓아 다음 생에 좋은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 불교 신자들의 1차 목표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음이요, 해탈이다. 해탈한 부처는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
 결국 삶은 삶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미학은 이와 같은 불교적 세계관에서 나왔다. 세상에 태어나 사는 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기에 불교는 염세적 종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이슬람교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 불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도교와 같은 뿌리인 것처럼 내세관도 그리스도교와 많이 닮았다.
 이슬람에서 죽음은 현세 삶의 일단락이자 고차원적 삶으로 나가는 새로운 단계다. 내세에서의 삶은 현세에서의 삶의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현세는 단순히 내세를 위한 준비 기간이 아니라 적극적 자세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이슬람에도 천국과 지옥이 있다. 천국은 창조주인 신과 만남을 통해 궁극적으로 그에게 돌아가는 것이며, 지옥은 이승에서 지은 죄에 대한 길고도 가혹한 징벌을 받는 것이다. 인간은 천국의 길목에서 죄를 씻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연옥과 유사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지옥이 영원하지 않다는 점은 그리스도교와 다르다. 이슬람의 지옥은 영원한 응징이 아닌 정화의 과정일 뿐이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철저한 영적 정화를 거쳐 천국에 동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각 종교의 서로 다른 교리 만큼이나 내세에 대한 이해 또한 다르다. 유한한 인간의 관점에서 다른 종교들의 내세관에 대해 함부로 진위를 논할 수는 없다. 더더구나 죽음은 아무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종교들의 각기 다른 내세관을 통해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내세는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죽음 이후 세상에 대한 논의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는다고 해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종교에 포함시킬 것인지 아닌지 논란을 빚고 있는 유교를 제외한 세계 종교들의 한결 같은 가르침이다.
 둘째, 내세에서의 삶은 현세 삶에서 절대적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저 세상에서의 삶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윤리적 내세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종교들은 일치한다.
 가톨릭교회는 세상 마지막 때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을 믿으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이뤄질지에 대해서는 섣부른 상상을 금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유한한 인간이 죽음을 넘어서는 무한한 하느님의 역사를 설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그럼에도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며, 이 세상 삶과 상관 없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세계 종교들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위안과 희망을 준다. 다른 종교들을 통해서도 희미하게나마 전해진 하느님의 신비가 아닐까.

 
남정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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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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