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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8> 시인 정지용 프란치스코

민족과 신앙에 대한 열정, 시로 피어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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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시 `향수`를 모르는 한국인이 있을까. 시인 정지용(프란치스코. 1902~1950?)은 그 시 한 편만으로도 이미 `민족 시인`이다.

 하지만 그가 6ㆍ25전쟁 중 납북되면서 그의 시가 해금되기까지는 전쟁이 끝나고서도 35년이 걸렸다. 1988년이 돼서야 그의 시가 해금돼 가톨릭 시인으로서 교회 안팎에서 완전히 복권됐으며, 1989년에는 정지용 문학상이 제정된다. 또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그의 삶과 문학, 신앙이 새롭게 재조명되기에 이른다.


 
▲ 가톨릭 신앙과 민족주의, 모더니즘을 융합시킨 거장 정지용 시인.
사진은 1930년대 초 모교인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할 당시의 모습이다.
 


   #불꽃 같은 문학으로 온 겨레 사랑 받은 시인

 시인은 1902년생이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한의사이던 아버지 정태국씨, 어머니 정미하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충북 옥천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를 나온 그는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고)에 진학, 박종화, 홍사용, 정백 등과 사귀며 문학의 길에 들어선다. 당시 박팔양 등과 함께 동인지 「요람」을 펴내고, 신석우 등과 문우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병기와 이일, 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 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다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으나 박종화와 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이른바 `휘문사태`였다.

 정지용 문학의 요람은 역시 휘문고보였다. 휘문고보 재학 시절인 1919년 12월 「서광(曙光)」지 창간호에 생애 첫 작품으로 소설 `삼인`을 발표했으며, 문우회 학예부장으로, 교지 「휘문」 창간호 편집위원으로 그는 휘문고보에서 문학적 재주를 발휘한다.

 일본 교토에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던 1923년 4월 무렵에 이미 자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향수`를 써서 「조선지광」(65호)에 발표했다. 도시샤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 휘문고보 교사로 취임한 이듬해인 1930년에는 김영랑,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했다.


 
▲ 1931년 정지용 시인과 부인 송재숙 프란체스카, 장남 정구관 베네딕토씨.
 

 1933년은 특기할 만한 해다. 그해 6월 창간된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참여한 정지용은 이 잡지를 통해 이상의 시를 세상에 공개한다. 또 자신의 시 `해협의 오전 두 시` 등 시 8편과 산문 `소묘 1ㆍ2ㆍ3`을 발표한다. 당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즉 카프(KAPF)의 입장에 반대한 그는 순수문학의 기치를 세웠다. 이를 위해 결성한 9인회에 가담해 이태준, 이무영, 유치진, 김기림, 조용만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모더니즘운동을 벌였고 문학 공개강좌를 가졌으며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이후 「문장」지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고, 해방이 되면서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대)로 옮겨 한국어ㆍ라틴어 담당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됐다. 1946년엔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돼 고정란인 `여적(餘滴)`과 사설을 집필했고 이듬해 이화여대 교수로 복직했다. 서울대 문리대 강사로 출강하며 `시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이화여대 교수직조차 사임한 뒤 서울 녹번리(현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 은거하며 서예로 소일했다.
 

 
   #가톨리시즘은 2000년간 교양의 원조

 일제 강점기 말은 우리말로 시를 쓰는 일조차 `죄`가 되는 엄혹한 시대였다.
 그래선지 그는 신앙에 더 매달렸다. 그가 언제 세례를 받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일본 도시샤대학 유학 시절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그는 신앙생활과 기도문 번역에 특히 열심을 보였다. 경성대목구 종현(현 명동)본당 청년회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청년회 활동이 일제 강압으로 무산되고 재속 프란치스코회 서울형제회가 설립되자 조종국, 한창우, 류홍렬 등과 함께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1937년 백동(현 혜화동)성당에서 오기선 신부 주례로 착의식을, 3년 뒤 허원식(서약식)을 한다. 다만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그의 활동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가톨릭평화신문  201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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