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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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 <22> 두 번에 걸친 투옥

사도 바오로, 로마에서 장렬하게 순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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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 노트=두 번째로 투옥된 바오로 사도가 죄수처럼 쇠사슬에 묶여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재판은 결국 사형으로 판결이 난다.
그리하여 로마 시민인 바오로는 참수된다.
손이 묶인 채 동쪽으로 돌아서 하느님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자 그의 머리는 땅에 떨어지고 주님을 찬양하던 그의 입은 영원한 침묵에 잠긴다.
한 달 동안 소티리우스 대주교와 바오로 사도의 선교여행 길에 함께한 나는 그 가슴 떨리는 순간을 그리며 진한 눈물을 닦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1,10-15)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바오로 사도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망이 무척 컸다. 로마에 왔으나 그는 일정 주거지에 연금된 영어(囹圄)의 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바오로는 기회가 닿는 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도착 사흘 뒤부터 유다인 명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자신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고 그들에게 자신이 영어의 몸이 된 이유들을 알려줬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를 찾아왔고, 그는 예언서에 근거해 그들에게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해 말했다. 일부는 그의 말씀을 받아들였으나, 상당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어의 몸으로 그리스도 전파

 로마에서 영어의 몸으로 있던 2년 동안 바오로는 자신이 머물던 집을 셋집으로 바꿔 선교 중심지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바오로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망으로 찾아왔다.(사도 28,7-29 참조) 사도행전은 여기에서 멈춘다. 바오로의 행적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바오로가 순교하기까지 행적에 대해 아주 귀중한 정보를 갖고 있다. 그것은 그가 처음 감옥에 갇혀 있던 기간, 즉 주후 61~63년에 썼던 서한 다섯 편과 그 이후 쓴 서한 세 편이다.

 이들 서한은 로마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꾸준히 늘어났음을 알려준다. 바오로는 신자 수가 이처럼 늘어난 이유를 그가 감옥에 갇힌 덕분으로 돌린다.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형제 여러분, 나에게 닥친 일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온 경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형제들이 내가 갇혀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확신을 얻고, 두려움 없이 더욱 대담하게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필리 1,12-14).

 바오로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당대 역사가들은 일찍이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으로 그리스도교 사상이 스며들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공인들 가운데서도 티토 플라비우스 클리메네와 그의 부인 도미틸라 외에도 다수가 그리스도인이 됐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 주후 약 55~117)는 주후 64년 그리스도교회가 엄청난 숫자로 불어나 있었고, 그리고 계속해서 불어났다고 전한다.

 바오로는 그의 첫 번째 영어 생활을 마치면서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 이렇게 썼다.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모든 성도가, 특히 황제 집안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필리 4,22).

 바오로의 재판은 2년이나 늦어졌다. 그것은 수많은 주요 사건들을 다루던 로마 법정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네로가 임명한 두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인 페니우스 루푸스(Fenius Rufus)가 바오로 사건을 맡아 주후 63년 여름에 재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잔인하지 않고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오로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바오로는 자유의 몸이 됐고, 어느 곳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됐다.

 4년간 영어의 세월을 보낸 후에 그의 손을 속박하던 쇠사슬이 풀렸기에 바오로는 새로운 봄이 그에게 찾아왔음을 느꼈다. 쇠사슬에 묶인 채 그가 크레타 섬을 지나 로마로 향할 때 그곳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자유로운 몸이 되자 그는 티토를 데리고 크레타로 가는 배에 승선했다.


   #두 번째 재판에서 사형선고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 날에 베드로 사도 설교를 경청했던 사람들 가운데 크레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고향 크레타로 돌아왔을 때 당연히 새로운 신앙에 대해 말했을 터이지만, 고향에서 체계적으로 선교 활동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크레타 섬에서 선교 활동의 새로운 장을 펼쳤던 것이다.

 그리고 티토에게 크레타 섬 선교 임무를 맡기고, 그곳을 떠나 그의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그곳에서 그는 코린토로 갔으며, 그곳에 에라스토스를 남겨놓았다. 그 후 에페소 사람 트로피모스가 앓아 누워있는 밀레토스로 갔으며, 그 이후에는 에페소로 가서 티모테오를 그곳에 정착시켰다. 그리고서 마지막으로 트로아스에 왔으며, 그곳에서 다시 마케도니아로 갔다.

 주후 66년 가을, 바오로 사도는 협력자들과 함께 니코폴리스로 갔다. 바오로는 그곳에서 겨울을 보낼 생각이었다. 가면서 티토에게 니코폴리스에서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다.(티토 3,12 참조) 티토는 니코폴리스로 가서 바오로와 함께 겨울을 난 것으로 보인다.

 주후 67년 봄, 바오로 사도는 티토를 일리리아(달마티아, 오늘날의 발칸



가톨릭평화신문  201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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