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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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영성의 샘을 찾아서] 성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라베르나, 시에나

오상(五傷)의 고통 속에서도 복음전파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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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는 많은 성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로마는 물론이고 아시시, 파도바, 피렌체, 토리노 등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라베르나와 시에나도 유명한 성인들과 인연이 닿아 있는 지역이다. 라베르나는 프란치스코회의 창설자 성 프란치스코가 오상(五傷)을 받은 곳이며, 시에나는 이탈리아의 수호성인 카타리나 성녀의 고향이다. 두 지역에 남아 있는 두 성인의 흔적들을 찾아본다.



▨ 성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은 라베르나

라베르나(La Verna)는 아페니노 산맥의 고립된 둔덕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생전에 이곳을 1215년부터 1217년까지, 1221년, 1224년 다섯 차례 찾아왔다. 기도와 묵상을 강조했던 그는 라베르나 곳곳을 돌아다니며 기도하고 묵상했다. 지금도 그가 기도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기도 공간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접근하기가 굉장히 어렵고 험준하다. 이 때문에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기도 공간이 많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성 프란치스코가 라베르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3세기 초다. 이 지역은 원래 카우시의 오를란도 카타니(Oriando Catuni) 백작 소유였다. 이 지방의 지주였던 오를란도는 로마냐의 몬테펠트로 인근 성 레오성에서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후 라베르나 산을 프란치스코에게 선물하게 됐다. 성인은 백작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곳이 기도와 묵상생활에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성인이 파견한 두 회원이 산을 답사하고, 기도와 관상에 적합한 봉우리에 거처를 마련했다. 옛 수도원을 개조한 피정의 집에는 영성을 갈망하는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현재 수도원에서는 초기 프란치스코회 복장과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인은 라베르나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다섯 차례밖에 방문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있어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성인은 이곳에서 프란치스코회의 회칙을 만들었다. 라베르나를 프란치스코회의 정신이 태어난 곳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성인으로 불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은 1224년 9월 오상(五傷)을 받았다. 오상성당은 전승에 따라 프란치스코가 십자가의 상흔을 받았던 장소 위에 세워졌다. 성당 안에는 불규칙적 육각형 대리석 표시가 있는데, 그 위에 ‘천상의 광채가 빛났고, 새로운 태양이 빛났으며, 바로 여기에 세라핌 천사가 나타나 프란치스코에게,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기를 청하면서 여기에서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흔을 박아주셨도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을 통해 성인이 오상을 받은 당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오상으로 고통이 심했지만 그는 이탈리아 중부를 돌아다니며 설교를 하고 세상 속으로 침투했다. 결국 오상을 받은 이후 2년 만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선종했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라베르나에 여전히 남아 있다. 수도원에는 그가 오상을 받을 당시 입고 있었던 옷, 악마의 습격과 유혹을 피했던 장소 등이 잘 보관돼 있다.


 
▲ 성 프란치스코가 세라핌 천사로부터 오상을 받은 라베르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 오상을 받을 당시 프란치스코가 입고 있었던 수도복.
 

 
▨ 성 카타리나의 고향, 시에나

교회의 크고 작은 불협화음과 대립을 해결한 성 카타리나는 1347년 시에나의 염색업자 베닌카사의 스물네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명랑했던 카타리나의 놀이터는 집 바로 뒤편에 위치한 도미니코수도회 성당이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성당에 가서 미사를 하고, 기도했다. 신심이 두터웠던 양친의 영향도 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는 특별했다. 예수와 성현들의 발현을 보기도 하고 탈혼 상태에 빠지는 경험을 했다. 7살 때는 평생 동정을 약속하기도 했다. 18살에 도미니코 삼회원이 된 성인은 수도회의 정신에 따라 복음을 실천하며 자신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갔다.

그는 1374년 주님의 발현을 체험한 후 오상을 받았다. 상처는 눈에 띄지 않아 임종 후에나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게 지식과 은혜의 웅변을 줄 것이니, 여러 나라를 다니며 권세가와 지도자들에게 나의 소망을 전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성인은 여러 곳을 여행하며 평화를 역설했다. 덕분에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를 배반하고 추방시키려던 세력이 중재됐고, 70년 넘게 프랑스 아비뇽에 체류하던 교황이 로마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성인은 1461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1939년 이탈리아 수호성인으로,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언됐다.

카타리나 성인의 고향 시에나는 그의 흔적이 많이 남겨져 있다. 현재 도미니코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생가에는 영성적으로 남달랐던 어린 시절을 비롯 그의 생애가 그림으로 남아 있다. 생가 인근의 도미니코성당에서는 성인의 두개골이 모셔져 있다. 유해는 로마에 있지만 성인의 고향 시에나에서 유해의 일부를 요구하자, 교황이 두개골을 보냈다고 한다. 두개골 유해는 도미니코성당에서 일 년에 딱 한 번 외부로 옮겨진다. 바로 성인의 축일인 4월 29일이다. 그날만 되면 행렬을 보기 위해서 시에나 시민뿐 아니라 전 이탈리아 사람들이 다 모여든다고 한다.

시에나는 성 카타리나 성녀 외에도 이탈리아 최고의 성당이자 조각과 회화, 로마네스크 양식이 어우러진 대성당이 유명하다. 로마시대 미네르바 여신에게 봉헌된 신전 위에 세워진 성당은 1136~1382년에 걸친 긴 공사 기간 동안 수많은 저명한 예술가들의 손이 대성당을 거쳐 갔다. 당초 성당의 규모가 더 컸지만 흑사병으로 인해 권력이 약해지면서 현재의 형태가 됐다. 가장 흥미로운



가톨릭신문  201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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