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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성경주해] (232) 창세기 22,13

이사악·그리스도 제사 이뤄진 장소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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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창세 22,13 】

"…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이 모든 일은 십자가의 예형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요한 8,5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오래 전 옛날에 살았는데 어떻게 그것을 보았을까요? 예형으로, 그림자로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본문에서 양이 이사악 대신 바쳐졌듯이, 여기에선 이성적 존재인 어린양께서 세상을 위해 바쳐지셨습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미리 그림자를 통해 개략적으로 묘사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모든 것이 그림자 안에서 어떻게 예표되었습니까? 그때는 외아들이었고, 이때도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때도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이때도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앞의 인물은 자기 아버지(아브라함)에 의해 번제물로 바쳐졌고, 뒤의 경우엔 그분의 아버지(하느님)께서 내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런 말로 크게 외칩니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2). 지금까지는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재가 더 우월함이 이제 드러났습니다. 이 이성적인 어린양(그리스도)은 온 세상을 위해 바쳐졌습니다. 그는 온 세상을 정화했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창세기 강해」 47,14).

이사악과 그리스도의 제사가 이루어진 곳은 같은 장소

이사악은 살해당하지 않고 숫양이 도살되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진행된 것은, 이사악이 실재가 아니고 표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 이사악 안에서 묘사되었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헌신적 사랑을 놓고 사람들과 경쟁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은 죽을 운명을 타고 난 자기 아들을 하느님께 바쳤는데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반면 하느님께서는 불사로 태어나신 당신의 아들을 인류를 위해 죽음에 내주셨습니다. 이사악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고 숫양은 그분의 인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신성이 아니라 인성이라고 믿어지듯이, 이사악이 아니라 숫양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또 다른 신비를 들어 보십시오. 사제인 복된 히에로니무스는, 오래전 유대인들과 원로들로부터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이사악이 제물로 바쳐졌던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말을 분명하게 들어 알고 있다고 쓴 바 있습니다.…복된 아브라함이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곳으로부터 사흘 길을 걸어와 이른 곳이 바로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었습니다. 옛 사람들의 기록에는, 십자가가 세워진 장소가 첫 번째 아담이 묻힌 곳이라는 내용도 있습니다(제2경전에 속하는 제2에스드라 3,21 참조). 게다가 그 장소가 해골산이라고 불린 이유는 첫 인간의 머리가 그곳에 묻혔다고 전해져 왔기 때문입니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설교집」 84,5).


노성기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한국교부학연구회원)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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