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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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의 날] 한국생활 체험 수기 최우수상 수상작/ 네팔인 란주 스레스하씨

"이제 네팔 음식보다 한국 음식이 더 맛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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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생활 체험 수기 최우수상을 받은 란주 스레스하씨가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나는 네팔 사람이다. 내가 살았던 수도 카트만두는 일 년 내내 적당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네팔에서도 가장 날씨가 좋다. 그전에 나는 한국을 잘 알지 못했다. 다만 학창시절 수업이 끝나면 위성방송에서 나오는 아리랑TV를 즐겨보곤 했다. TV로 본 한국은 크고 멋진 빌딩과 재미있는 곳이 많은 신기한 나라였다. 나는 한국 드라마 `꽃보다 남자`, `풀 하우스`와 빅뱅, 소녀시대, 싸이 등 가수들을 무척 좋아했다. 친구 중 몇몇은 한국으로 시집을 가기도 했다. 그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한국에 가기 위해 서울 남대문시장과 비슷한 곳인 네팔 시내의 한 마트에서 열심히 일했다.

#남편을 만나 혼인하기까지
 그러던 어느 날 부산으로 시집 간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의 남편 친구 중 한 사람이 네팔로 트레킹을 오려는데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사실 나와 남편 친구를 만나보게 하려는 친구의 속셈(?)이었다.

 한창 한국에 가고 싶었던 나는 이왕 결혼할 거라면 착한 한국 남자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 마음을 하느님께서 아셨던 걸까. 친구 말대로 그 남자는 한국에서 비행기로 8시간 거리인 먼 나라 네팔까지 트레킹하러 왔다. 공항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젊고 얼굴이 하얀, 멋지게 생긴 남자가 걸어 나오는데 좋은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짧은 영어와 보디랭귀지로 열심히 이야기를 건넸다. 잘 알아 듣진 못했지만 밝은 미소로 답해줬고, 그는 엉터리 영어로 열심히 말을 이어갔다. 그 모습이 참 친근해 보여 좋았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네팔 이곳저곳을 다니며 안내해줬다. 우리는 자연스레 친구가 됐다. 관광을 끝내고 한국으로 가던 날 그는 내게 전화번호와 집 주소를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알려줬다.

 일주일 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보고 싶다며 번역기를 동원해 어떻게든 나와 대화하려고 노력했다. 몇 달 후 그가 전화로 "나 카트만두에 왔어요. 우리 만나요!"라고 무작정 말했다. 믿지 않았지만, 그는 거짓말처럼 네팔로 날아와 식당에서 식사 주문까지 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 싶어서 다시 왔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으로 발전했고, 얼마 후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됐다. 네팔에서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일주일 후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결혼 2개월 후인 2010년 8월, 두려움과 설렘, 걱정을 안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예정보다 2시간 늦게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장 문이 열리는 순간 남편이 날 보며 미소 짓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남편과 시댁 식구 모두 환영해줬다. 그렇게 나의 한국생활이 시작됐다.

#한국생활에 적응하면서…
 처음엔 한국생활이 그리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대화할 사람이 없어 점점 외로워져만 갔다. 베트남ㆍ중국 사람은 많아도 네팔에서 시집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남편은 서울 동대문ㆍ남대문 시장, 명동을 데리고 다니며 대중교통 이용법과 쇼핑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가족들은 나를 많이 신경 써줬고, 나는 한국말을 배우며 적응해갔다.

 그러다 한동네에 살고있는 네팔 친구 아몬 언니를 알게 됐다. 아몬 언니와 나는 인근 다문화센터에서 한국말도 배우고, 쉬는 날이면 집에서 네팔 음식도 만들어 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힘들고 지칠 때 아몬 언니와 밤늦도록 함께하며 막걸리도 한 잔씩 한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정신없이 산다. 한국은 뭐든지 빠르게 변한다. 일도 빨리빨리, 패션도 계절별로 빨리 변한다. 나는 겨울이 싫지만, 한국에서 눈을 처음 봐서인지 그 모습은 정말 신기하고 멋지다.

 한국은 사계절이라 옷에 들어가는 비용이 많다. 남편은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백화점의 비싼 옷이며 화장품도 아무 말 없이 잘 사줬다. 그래서 많이 저렴한 줄 알았는데, 한국 돈을 알고 난 후 이젠 무조건 싸고 질 좋은 물건을 찾아다닌다. 처음에는 한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김치, 마늘, 생선 냄새 때문에 거부감이 컸다. 몇 달은 잘 못 먹고, 먹으면 금세 배탈이 났다. 지금은 네팔 음식보다 한국 음식을 더 좋아한다. 불고기, 삼겹살, 비빔밥, 부대찌개, 감자탕을 즐겨 먹는다.

 한때 남편이 회사 일로 바빠서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시부모님과는 깊은 속마음을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그래선지 가끔 남편과 다투기도 했다. 남편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영어와 네팔어 공부를 시작했고, 우리는 더 신뢰를 쌓아갔다. 그리고 예쁜 아기도 낳았다. 임신 후 네팔 음식을 한 아름 싸들고 온 친정 엄마는 한동안 손주도 보살펴줬다.

 나는 가끔 시어머니 말씀을 오해해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마다 시어머니는 미안하다며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다. 처음엔 따로 나가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시아버지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던 모습을 보며 함께 살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나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이다. 그리고 한국말을 열심히 해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


 
▲ 남편 안민호씨와 란주 스레스하씨.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3-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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