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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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체험수기] 주님과 함께 걷는 길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신앙체험수기 대상 수상작 / 김하정 율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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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앞마당에 들어서면 마음이 설레기 시작합니다. 어린 날, 논둑길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문득 노을 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미워하고, 속 끓이고, 걱정하느라  또다시 세상 먼지 다 묻혀 누더기가 되어버린 부끄러운 마음 하나만 들고 아버지 앞에 왔습니다. 맘 편히 하소연 할 곳이 당신밖에 없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주님께서 미소 지며 말씀하십니다. `괜찮다….`

 

 주님의 달력은 이제 시작인데, 세상의 달력은 끝을 향해 갑니다. 그 끝의 다음에는 어김없이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 싹트고 있겠지요.

 주님이 오시는 날이 가까워지는 날, 소리 없는 함박눈이 세상을 고요 속에 품어 안습니다.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 빠지듯이 세 아이가 저마다의 학교로 등교하고 난 아침, 언제나 그렇듯이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다리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일하러 나간 남편과 공부하러 나간 아이들이 무사히 들어올 그 시간을 기다립니다. 부디 세상이 조금만 더 평화롭기를, 오늘은 내가 조금만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몇 년 전에는 1년 남짓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매일같이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2년 전 뇌동맥류 수술을 받은 후로는 건강이 좋질 않아서 직장을 구하려고 애를 써봐도 쉽지 않고, 고된 노동은 엄두조차 못 냅니다. 세 아이를 키우느라, 먹고 사느라, 그리고 남편의 오랜 실직으로 불어난 빚더미에 허덕이다 작년에는 월세 55만 원의 열다섯 평 다세대 주택으로 옮겨 다섯 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1억 원이 넘는 빚은 23년 살아내느라 진 무거운 형벌과도 같습니다. 대학생, 고등학생인 세 아이의 학비 대출금은 오늘도 늘어만 갑니다. 그나마 남편이 몇 년 전부터 지인의 도움으로 작은 회사에서 일하게 되어 십여 년 만에 통장으로 월급이 들어왔습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비록 대졸 초임보다 못한 월급이라도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남편과는 24년 전, 같은 직장에서 동료로 만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조건으로 따지자면 나는 명문대를 졸업한 재원이었고, 그는 지방의 이름 없는 대학을 나온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이었습니다. 직장에서도 나는 CEO 비서실에 근무하는 미래가 촉망되는 사원이었고, 그는 말단 영업사원이었습니다. 우리의 결혼을 우리 집에서도, 시댁에서도, 친구들도 다 뜯어말렸지만, 우린 젊음 하나 믿고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은 당시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는데, 그이나 나나 서로의 종교에 대해 강요하거나 간섭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결혼하기로 약속한 후 어느 날 문득, 그가 천주교로 개종하겠다고 말하더군요. 저를 보니 아무래도 개신교로 개종할 것 같지는 않고, 같은 하느님을 믿는 것인데, 다를 것이 무엇이겠냐고 하면서 자기가 가톨릭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명동성당에서 교리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고 혼인성사를 받았습니다. 혼인성사 받던 날, 남편이 감격해서 울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남편의 마음을 움직이신 분이 하느님이셨음을…. 얼마나 은혜로운 기적을 우리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주셨는지를 그때는 조금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당연히 받을 것을 받는 것처럼 교만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나를 위해 종교를 바꾼 그이에게도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난 능력 있는 여자고, 그도 성실하고 지혜로우니까 주변 사람들의 염려쯤은 말끔히 씻어낼 만큼 잘 살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결혼이었습니다. 학벌이나 능력, 재산 따위의 세상 조건 다 마다하고 오직 사랑 하나로 내가 남편을 선택했다는 오만함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 우리의 꿈은 산산이 깨져버렸습니다. 제가 첫 딸을 출산하면서 부득이하게 퇴직을 하게 된 후 얼마 안 되어서 하루아침에 남편이 실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서서히 우리는 지옥의 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17~18년 동안 남편은 아무리 노력해도 직장을 구하지 못했으며, 제대로 된 월급조차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성실했으나, 지방의 이름 없는 대학을 나왔을 뿐, 이렇다 할 기술도 없고, 외국어 실력도 없고 쟁쟁한 인맥도 없고, 제대로 된 경력도 없고, 돈도 없는 그이를 받아줄 곳은 없었습니다. 어찌어찌 들어가는 작은 회사마다 죽도록 일만 하고, 월급을 받지 못하게 되거나, 어느 날 갑자기 회사가 문을 닫아버린 경우도 몇 번을 당했습니다.

 어머니를 고생시킨 무능력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던 남편은, 아버지처럼 살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무척 심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남편은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나중에 세어보니 무려 열일곱 가지의 일을 전전했더군요.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이 지나쳐 다단계의 유혹에도 넘어간 적이 있었지요. 그런 그이를 되돌려놓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다시 마음을 잡은 남편은 포장마차에서 천 원짜리 조각피자도 팔았고, 길거리에서 밤장사도 하고, 꽃장사도 하고, 빚내서 차린 작은 치킨가게는 얼마 못가 망해버렸습니다. 다시 빚을 내 산 중고 트럭으로 과일 장사를 했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두 배, 세 배의 빚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도 아이들 키우며 닥치는 대로 번역도 하고, 과외교습도 하고, 학습지 교사일 하느라 밤늦게까지 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생만 하고, 보람은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친정 엄마와 동생이 돈을 모아 자금을 대어주어 작은 영어교습소를 차릴 수 있었지만, 2년 만에 그마저도 엄청난 빚만 남긴 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외면하는 것 같았습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 앞에서는 어떤 노력도 소용없었습니다. 전재산이라고는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1200원이 전부였던 어느 날, 그 돈을 쥐고 애들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었지요.  

 

 남편과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습니다. 어느 날, 저와 돈 문제로 다투고, 남편이 토해내듯 던진 말이 지금도 잊히질 않습니다. 심장이라도 다 떼어주고, 사라지고 싶다고….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리라 발버둥쳤으나, 결국은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 같은 자괴감에 그이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현실 앞에서, 우리의 사랑과 믿음도 빛이 바랬습니다. 처음에는 남편의 성실함이 언젠가는 빛을 발하리라고 위로하던 나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망하는 마음으로 변해갔습니다. 무능력한 남자 잘못 만나 이 고생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혼자 살았으면 내가 가진 능력만으로도 승승장구했을 텐데, 보잘것없는 동네에서, 이렇게 보잘것없는 아낙네로 하루하루 돈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살지는 않았을텐데, 제 교만은 꺾일 줄을 몰랐습니다.  

 

 남편은 나를 원망했으며, 나는 남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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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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