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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 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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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목

 글=김어흥/그림=권소현


 
   1996년에 집계된 UN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60여 개 국가에 대략 1억 1천만 개나 되는 지뢰가 묻혀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대략`일 뿐……. 지금도 누군가를 미워하며 깔리고 있는 새로운 지뢰들. 그리고 미움의 증거로 지구에 오돌토돌한 곰보자국만 남긴 채 터지는 지뢰들. 누구도 그 정확한 수를 알 수는 없다. 1996년 이후, 아예 통계 자체가 없는 걸 보면 아마 UN도 이제 더하기 빼기를 포기한 모양이다. 아니면 통계를 내다 미쳐버린 담당자가 스스로 지뢰밭으로 뛰어들었든가. 그런데, 더 미쳐버릴 사실은,

 우리 집 마당에도 그 지뢰라는 놈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졸업이 한 학기밖에 안 남았는데, 휴학을 결심했다. 웬만하면 버텨보려고 했지만 취업준비생이자 외아들인 나, 무직인데다가 장애인인 아버지. 그리고 유일한 유직(有職)이었지만 지난 달 자궁암 3기 판정을 받은 어머니까지. 이 드라마틱한 3종 세트는 품질 검사도 끝나지 않은 나를 노동시장에 저가 공세로 풀었다. 하필이면 이 덥고 축축한 여름에.

 휴학신청서를 들고 운동장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매미의 돌격명령과 함께 시작된 태양과의 육탄전은 도저히 끝날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해시계가 되어 걸어가는 사람들. 각자 양산, 선글라스, 모자, 아이스크림 등등, 다양한 무기들을 들고 저항해 보지만, 모두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그림자만 쫓고 있었다. 도망갈 자리를 찾아야 했다. 사람들을 따라 대학본관 건물로 투항했다. 아르바이트 게시판이 보였다. 지독한 태양을 피해 온 사람들. 불행히도 키는 작고 눈도 나쁜 터라 이들 사이를 비비며 들어가야 했다. 서로의 체액들이 찐득하게 줄기를 맞대면서 내 땀은 발효에 가까워졌다. 피하려는 사람들 사이로 작은 틈이 보였다. 맨 뒤에 적혀있는 숫자들. 내 값을 매겨놓은 숫자들. 간혹 맘에 드는 숫자가 있긴 하지만 그 옆에 달라붙은 이런저런 자격조건들은 눈에 넣기엔 너무 아팠다. 갑자기 앞에 끼어든 남자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월 100만원, 그렇게 보습학원 강사자리를 점찍고 있을 때였다.

 "저...... 혹시 안 병장님?"

 이 더위에 넥타이까지 챙겨 맨 남자. 헤어왁스로 앞머리를 건방지게 세웠지만 태도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병장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아마 군대 후임? 제발 알아봐 달라는 듯, 애타는 얼굴에 일단 경계의 눈빛은 슬쩍 풀어주었다. 대충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억은 모이통에 껴버린 닭대가리처럼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빼지도 못하고 그 자리만 쪼고 있었다. 일단 아는 척을 하려면 이름을 불러줘야 하는데……. 얼굴은 기억이 나더라도 이름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흔한 이름일수록 더.

 "저 현철입니다. 뺀질이 김현철이요."

 기억이 매끈하게 빠져나왔다. 그래 김현철, 어떻게 너를 까맣게 잊어버릴 수가 있었을까? 그래도 학교 후배라고 남들보단 좀 덜 미워했었지. 새파란 수납도장이 찍힌 등록금 영수증을 손에 든 현철이는 어색한 순간을 메우려는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래도 반가운 척, 피할 틈을 기다렸다. 녀석은 들어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듯, 그동안에 사연들을 앞세워 학교 밖으로 끌고 나갔다.

 말에 끌려가는 것도 실랑이라고 술집에 도착했을 무렵, 우리는 다시 땀에 흠뻑 젖어 버렸다. 에어컨 바람은 태양의 뒤꽁무니를 조롱하듯 문틈으로 세차게 세어 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우리의 처지처럼 뚜렷한 온도 차에 녀석의 안경은 금세 뿌옇게 변해버렸다. 안경을 벗자 녀석의 왼쪽 눈썹 아래로 낯익은 흉터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건 그대로네?"

 녀석은 어리둥절 쳐다봤다. 손가락이 눈 위를 가리키자 그제야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휴,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도 오줌 지린다니까요."

 바로 오늘처럼 아주 찐득찐득하게 숙성된 여름날이었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 온 내무반에는 딱 보기에도 뺀질거릴 것 같은 신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 퇴비를 뿌린 고랭지 배추밭을 가로질러 온 지라 내무반은 온통 똥 비린내로 가득했다. 똥냄새에 취했는지, 아니면 우르르 쏟아지는 작대기들의 무게 때문인지, 녀석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모두 모른 척, 군화를 벗기 시작했다. 신병은 그제야 다리 잡힌 방아깨비마냥 벌떡 일어났다. 고참 병장은 신고는 됐고 노래나 시원하게 하나 뽑아보라고 했다. 신병은 의외로 수월한 신고식에 풀린 군화 줄처럼 실실거리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음음! 이병 김현철! 현철의 트로트 히트곡 하나 뽑겠습니다!"

 혹시...... 설마 그 노래? 아! 병신 새끼! 나는 녀석의 입을 막으러 막 튀어나갔다. 하지만 이미 노래는 녀석의 간드러진 목소리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손대면 토옥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그때 어디선가 날아 온 똥 묻은 군화는 녀석의 얼굴로 날아가 눈 위에 기다란 상처를 남겼다. 우리가 손대면 터지는 지뢰제거 작업을 마치고 지금 돌아왔다는 사실을 이 녀석도 알고는 있었을 텐데…….

 "제가 그때 살짝 돌았었나 봐요. 아침마다 거울 보며 반성하고 있습니다."

 현철이는 안경테로 다시 상처를 살짝 가렸다. 여름이라 똥독도 올라 한참 고생했던 생각도 났다. 녀석도 그 생각이 났던지 건배를 하면서 움찔거리며 단숨에 잔을 비웠다.

 "3년 만에 학교 오니까 정말 낯설어요."

 1년 후배니까 이미 복학을 했어야 정상이었다. 현철이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도 등록금 때문에 1년을 더 쉬었다며 한숨인지 트림인지모를 소리를 흘렸다. 뭐, 둘 다 비슷한 처지인 것 같아 슬쩍 내 사연 많은 휴학 소식을 알렸다. 조금 섭섭해하는 표정이었지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제 맥주잔 앞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그럼 혹시 일자리 필요하세요?"

 녀석은 내 답도 듣지 않고 나이트클럽 웨이터 생활을 털어 놓았다. 맨 처음 보조일 때는 수입이 신통치 않았지만 점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단다. 3개월 만에 정식 웨이터로 올라서더니, 여자들의 손목이 돈 나무 가지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바로 월수 500이상은 충분히 벌었다 했다.

 "사실 6개월 만에 남은 학기 등록금을 다 벌었는데. 막상 돈이 벌리다 보니 발을 못 빼겠더라고요."

 하지만 1년을 넘기려니 영영 학교와 이별할까봐 결국 나이트클럽 사장의 의형제를 맺자는 파격적인 협박도 정중히 거절한 채, 미련 없이 그만 두었다고 했다. 그래도 졸업할 때까지 생활비까지는 이미 벌어 놓았다고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거 성질만 좀 죽이고 살살거리면 그래도 할만해요. 제가 형님, 아니 사장님께 잘 말씀 드려볼게요. 아참 거기 박 상병님도……."

 박 상병이라…….



가톨릭평화신문  201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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