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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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장 최영수 대주교 삶과 신앙

대구대교구 100주년의 든든한 반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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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고등학교 재학시절 최영수 대주교.
 
▲ 1970년 11월 6일 사제 서품식 후 서정길 대주교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최영수 대주교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 1979년 교구에서 사목할 당시 마더 데레사 수녀를 배웅하는 최영수 대주교 모습.
 
▲ 2001년 2월 27일 주교 서품식에서 이문희 대주교에게 안수를 받고 있는 최영수 대주교.
 
   "신부님요, 제가 밥 갖고 왔십니더. 식사하이소."

 1982년 대구시 산격성당을 한창 짓고 있던 무렵, 당시 본당주임이었던 최영수 대주교에게 한 신자가 밥 한 솥을 들고 사제관 문을 두드렸다.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임시 성전으로 사용하던 건물 한 구석을 사제관으로 꾸미고 직접 연탄을 갈아 넣으며 끼니를 해결하는 주임 신부 걱정에 한 신자가 찾아 온 것이다.

 최 대주교는 미안한 마음에 "다음부턴 이런 거 가져오지 말라"며 신자를 등 떠밀어 보냈다. 당시 최 대주교 별명은 `너구리 신부`. 자신은 돌보지 않은 채 끼니로 `너구리 라면`만 끓여 먹자 신자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산격본당 사목위원을 지낸 장병진(토마스, 58, 대구 산격본당)씨는 "식사 한 번 대접하려고 해도 좀처럼 받지 않으셨다"며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는 분"이라고 기억했다.

 최 대주교는 연탄가스에 중독될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 무엇도 성전 건립에 대한 열의를 꺾지 못했다. `성전 건립 기금 마련 바자`를 연 것도 교구에선 최 대주교가 처음이다. 경북고 동기인 김영수(마르첼로, 66) 교수는 "최 대주교는 지금까지 영명축일에 들어온 물적 예물은 봉투도 열어보지 않은 채 교회를 위해 몽땅 내놓았다"고 감탄하면서 "때론 내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그는 검소한 생활로 정평이 나 있다. 대구평화방송 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개인 비서도 두지 않고 모든 업무를 직접 도맡아 했다. 평화방송 직원들은 "대주교님이 이름있는 옷을 입으신 걸 본 적이 없다"며 "한 번 산 신발은 7~8년은 신으신다"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검소한 삶을 살게 된 데는 어릴 때 넉넉지 않았던 가정형편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최석암(비오)씨와 김정식(막시마)씨 사이에 4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학창 시절, 방과 후 과수원으로 달려가 부모님을 도왔고 주말에는 성당에서 복사반과 성가대 활동을 하며 성소의 꿈을 키웠다. 큰 형 최상수(마르코, 80)옹은 "형편이 넉넉지 않은 데도 항상 친구들과 나누는 아이였고 또 온화하고 강직한 성격에 친구들이 많이 따랐다"고 회고했다.

 베풀 줄 아는 그에게 `가난`은 십자가였다. 고등학생 시절 건축과나 공대에 진학하려 했던 것은 가난한 시골 환경을 바꿔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남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는 본당 신부의 삶에 매력을 느껴 1961년 가톨릭대에 입학했다. 더 가난한 이들을 돌보려 사제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는 1970년 사제품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1코린 1,5)를 사목 성구로 삼아 사제생활을 시작했다.

 주교로 서품되기 전 최 대주교는 20년 동안 대구대교구 포콜라레(마리아 사업회) 지도 신부를 지냈다. 대구 포콜라레 최은규(베르나뎃따) 여자대표는 "대주교님은 `십자가에 대한 사랑`을 강조해 오신 분"이라며 "큰 아픔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며 고통을 잘 껴안고 살아가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최 대주교는 생활 속에서 복음을 실천하라는 포콜라레 영성을 바탕으로 6년간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를 보필하며 교구의 손과 발이 돼 왔다. 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사형폐지 운동에 앞장섰고, 청소년 복음화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를 아는 이들은 "대구대교구의 100주년 문턱에서 대주교님이 갖고 계신 달란트로 교구 발전과 복음화에 앞장서 주셨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이지혜 기자bonaism@pbc.co.kr


[최영수 대주교가 걸어온 길]

 ▲1942년 3월 23일 경북 경산 출생
 ▲1961년 4월~1970년 7월 가톨릭대 신학부
 ▲1970년 11월 6일 사제수품
 ▲1970년 11월~1971년 10월 신암본당 보좌
 ▲1971년 11월~1972년 10월 대봉본당 보좌
 ▲1972년 10월~1976년 10월 영천본당 보좌
 ▲1976년 10월~1979년 6월 로마 연수(포콜라레 영성)
 ▲1979년 6월~1979년 12월 교구 사목국
 ▲1979년 11월~1979년 12월 교구 관리국(겸)
 ▲1979년 12월~1982년 9월 교구 관리국장, 참사위원
 ▲1982년 8월~1986년 1월 산격본당 주임
 ▲1986년 1월~1990년 6월 대구가톨릭대 사무처장
 ▲1990년 6월~1991년 3월 대구시립희망원 원장
 ▲1990년 6월~1991년 2월 논공가톨릭병원 원장
 ▲1991년 3월~1995년 7월 성동본당 주임
 ▲1995년 7월~1997년 2월 가톨릭신문사 사장
 ▲1996년 1월~2001년 9월 대구평화방송 사장
 ▲2001년 2월 27일 대구대교구 보좌주교 수품
 ▲2006년 2월 3일 대구대교구 부교구장 대주교로 임명
 ▲2007년 4월 30일 대구대교구 교구장 착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0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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