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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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김 추기경] 작고 낡은 수녀원에서 추기경과 함께 했던 아름다웠던 여름밤

마익현 신부(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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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 묘소 앞에서 고인을 위해 기도하는 마익현 신부.
 

 "김수환 추기경님이 방문하셨던 그날 밤은 가장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마익현(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지부 부지부장) 신부는 30여 년 전 김 추기경과 함께 했던 그 여름밤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마 신부가 서울 사당동본당에서 사목하던 1970년대 중반, 구역 내에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는 수녀원이 있었다. 말이 수녀원이지 33㎡(10평) 남짓한 낡고 작은 방이었다.
 
 어느날 그곳 수녀에게서 김수환 추기경이 수녀원을 축복하러 온다며 함께 미사를 집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마 신부는 추기경을 가까이에서 만나는 것이 처음이어서 무척 설레고 긴장됐다.
 
 다음날 일찍부터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골라 부지런히 다리미질을 했다. 기쁜 마음으로 미사 30분 전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도착해 김 추기경을 기다렸다.
 
 그런데 미사 시간이 가까워지는데도 김 추기경이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 신부는`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기셨나보다`라고 생각하며 수녀원으로 돌아가는데, 수녀원 앞 좁은 골목에서 30여 명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에게 "추기경님은 왜 못 오시냐"고 물었더니 그 중 한 사람이 "저기 앉아 계시지 않냐"며 좁은 골목 구석, 작은 돌위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그제야 야구 모자에 반팔 점퍼를 입고 돌위에 앉아 동네 사람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 추기경이 눈에 띄었다. 당연히 근사한 추기경 복장으로 왔으리라 생각한 마 신부는 그가 김 추기경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마 신부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자리여서 일부러 허름한 차림새로 오신 것 같았다"면서 "승용차도, 비서 신부도 없이 혼자 그곳에 오셨다"고 기억했다.
 
 이윽고 좁은 방 안에 제대를 차려놓고 미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유난히 천장 위에 사는 쥐들의 소동이 심했다. 쥐가 쉴새없이 "찍찍" 소리를 내며 뛰어다녀 미사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갑자기 김 추기경이 미사를 중단하고 입을 쑥 내밀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마 신부는 `추기경님이 혹시 기분이 상했을까`라는 생각에 긴장했다. 10초 정도 어색한 적막이 흘렀을까, 김 추기경은 "마 신부, 여기 있는 이 모두가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찬양하고 있습니다"고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하느님께서 창조한 생명인 쥐도 오늘 축복식이 기뻐서 저렇게 뛰어다닌다는 추기경의 재치 있는 농담에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은 한바탕 웃고 편안한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마 신부는 "두 시간 가량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쥐와 함께한 미사, 그리고 추기경님의 해맑은 미소는 잊히지 않는다"며 아름다웠던 여름밤을 회상했다.
 
 마 신부는 그 만남 전에도 성골롬반선교회 동료 신부들과 함께 스쳐 지나가듯 김 추기경을 만난 적이 있었다.
 
  "다들 추기경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는데도 추기경님은 신부들 이름을 한 명도 빠짐없이 불러주며 악수를 해 주셔서 신부들이 놀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어디를 가시든 그 곳에서 만날 사람들을 미리 숙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신부들이 큰 감동을 받았죠."
 
 마 신부는 사목하던 본당 견진성사가 있을 때 김 추기경과 함께 할 기회가 몇 번 더 있었다.
 
 김 추기경의 강론은 한국어가 서툴었던 마 신부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쉬우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이 세상에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따로 없습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사람을 위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가는 것입니다."
 
 마 신부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김 추기경의 강론내용이다. 마 신부는 김 추기경을 주제로 강론을 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30여 년 전 미사를 이야기하며 소박했던 김 추기경의 모습을 떠올린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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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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