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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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7苦 묵상] (2) 제2고(苦) “나 자신을 버림을 묵상합시다”

“당신께서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주셨습니다”, 불우하고 소외된 이들과 늘 함께하길 바랐던 참 사목자, 한국전쟁 후 가난에 시달리는 신자들 위해 직접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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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과 세 살 터울로 그보다 앞서 사제의 길을 택한 김동한 신부(오른쪽).
형제는 사제생활 중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어느 날.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가 대구에서 피란 중에 있던 예비사제 김수환을 불렀다.

“이제 사제서품 받을 준비를 하게. 언제가 좋을지 생각해보고 날짜를 잡아보게나.”

13살 사제가 돼야 한다는 어머니 등쌀에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입학해 서울 동성상업학교, 일본 도쿄 조치 대학, 학병 징집,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을 거치며 기다려 온 사제의 꿈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과 함께 영적인 갈등과 유혹도 많았던 긴 기다림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누나는 “네 형(김동한 신부)이 신부가 됐는데 너까지 신부가 될 거냐”며 탐탁지 않아하기도 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여러 번 회의를 느껴 마음에 꾀병을 내며 한 학기를 건너뛰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과 유혹에도 그는 하느님의 큰 섭리 안에 있었다. “주님, 사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길은 보여주지 않으시고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사제서품을 받으며 하느님께 이렇게 속삭였다.

한평생 착한 목자로 살아갈 수 있을지,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아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 두려움이 앞섰지만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며, 1951년 9월 15일 하느님 앞에 한 사제로 태어났다.

사제 김수환은 사목표어를 시편 51편의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정한다. 항상 부족하다고 느껴온 그는 하느님 앞에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이 말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죄인이 이제 당신이 선택하신 거룩한 사제가 됩니다. 오직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러한 새 사제 김수환의 고백은 그가 60여 년 간 사제로 살아가며 늘 자신과 가족보다는 이웃, 그 중에서도 가난한 이웃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토대가 된다.

그는 늘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는 착한 사제로 살아가길 바랐다. 가난한 이들에게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희망을 이어가길 소망했다.

하지만 첫 부임지인 안동본당(현 안동교구 목성동 주교좌 본당)에 발령을 받자마자 그를 기다리는 건 열악한 환경과 가난한 신자들뿐이었다. 성당에는 밥 끓여 먹을 솥 하나 걸려 있지 않았고 식사도 신자들이 사다 주는 밥으로 해결하곤 했다. 당시 안동은 전쟁 피해로 성한 집보다 불타 버린 집이 더 많았고, 읍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나무껍질을 벗겨서 가루를 내어 죽을 끓여 먹고 사는 집이 대부분이었던 상황이었다.

그럴수록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는 신자들, 나아가 지역민들의 가난을 해결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그들은 돌봐주지 않으면 가난에서 영영 헤어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막막하기만 했다. 본당 사제로서 무슨 일이든 해야 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그는 가난한 신자들을 돕기 위해 몇날 며칠을 고민했다.

결국 그는 모험을 한다. 부산에 있던 한국 교황대사 필스텐벨그 대주교를 직접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당시 거액인 2000만 원을 지원받고 만다. 대구대교구장 최덕홍 주교에게 돈을 건넨 그는 최 주교로부터 그중의 반인 1000만 원을 지원 받는 성과를 얻는다.

가난한 신자들에게 무작정 돈을 나눠주는 일은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성당 보수 작업을 시작하고 일한 신자들에게는 품삯을 후하게 쳐줬고, 궁핍하기 이를 데 없는 신자들에게는 형편에 따라 돈을 나눠주기도 했다. 고해실에 가장이 들어오면 교적을 대조해 가며 집안 형편, 생업수단, 농사 평수 등을 꼬치꼬치 캐물어 전해 줬다. 자신을 버리고 오직 가난한 신자들을 돌보기 위해 감행한 일이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새 사제의 열정이 일군 작은 기적이었다.

새 사제 김수환의 이러한 사랑 때문일까. 본당은 어느 정도 토대가 갖춰져 갔고 신자들도 조금씩 늘었다.

그는 신자들과도 금방 정이 들었다. 신자들 또한 그를 따라 볼일이 있어 대구에 다녀올 때면 성당 종탑 아래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신자들은 “신부님 대구 가지 마세요. 신부님이 하루라도 안 계시면 성당이 텅 빈 것 같아 우리가 너무 적적해요”라고 말하곤 했다. 신자들의 말에 한 가족이 됐다는 확신이 들어 새 사제 김수환은 순간 눈물을 보이고 만다.

모든 것이 어렵고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그에게 가난했지만 순박한 신자들은 고난에 따른 부활을 몸소 체험하게 했다. 또 착한 사제로 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이끌어준 소중한 동반자였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 바친 새 사제 김수환.

60여 년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사목했던, 교회가 허락만 해준다면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생활하고 싶었던 사제 김수환은 후에 첫 본당 부임시절을 이렇게 소회했다.

“신부로서 보람을 손꼽아 본다면 첫째로 신자들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가깝게 호흡하던 때였습니다. 신부란 나같이 주교가 되고 교구장이 된다고 해서 보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 직함이란 단지 행정직에 불과합니다. 일선 교회의 신부 시절, 특히 제가 새 사제로 사목했던 안동본당에서의 시절은 내 일생에서 가장 보람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건 제 자신을 버림으로써 이룬 작은 기적들로, 가난했지만 행복한 시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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