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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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7苦 묵상] (1) 제1고(苦) “아버지도, 나라도 없이 예수님을 따라 고통의 길을 걸었네”

가난·일제 치하… 멀고도 험한 ‘사제’의 길, 일곱살에 아버지 여의고 가난 때문에 장사꾼 꿈꿔, 일제 치하의 차별·학도병 등 온갖 시련 견디며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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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말했다. 하느님께선 각자에게 크나큰 은총의 선물을 마련해, 보자기에 싸 주셨는데, 그 보자기가 바로 ‘십자가’라고. 고통의 보자기 ‘십자가’를 풀지 않으면 은총도 부활도 없다. 우리가 사순시기를 보내는 이유다.

선종 1주기를 맞은 김수환 추기경도 일곱 개 고통의 보자기를 받았다. 그는 괴롭고 힘들었지만 묵묵히 그 보자기를 모두 풀었다. 그리고 당당히 하느님 성전을 향해 눈을 감았다.

사순시기를 맞아 선종 1주기를 보내는 김수환 추기경의 7고(苦)를 묵상하며 부활 희망을 염원해 본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하늘의 길이었다. 그러나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만큼은 십자가 너머 부활이 보이지 않는다.

신부가 되기엔 너무 가난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뜨거웠다. 소년 스테파노는 일곱 살 무렵 아버지를 잃었다. 어린 스테파노는 아버지의 관을 따라가며 울고 또 울었다.


 
▲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갖은 차별을 견뎌야 했던 일본 조치대학 유학 시절.
오른쪽이 김 추기경, 왼쪽은 동창인 박철 씨.
 

내 아버지, ‘무진박해 때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할아버지의 순교로, 갈 곳도 없이 떠난 피난길에서 태어나야 했던 아버지, 가난한 옹기장수였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울타리였던 아버지가 이제 없다.’

장례를 치르고 경북 군위 집 마루에 걸터앉은 스테파노는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의 부재와 가난이 십자가라는 것을 알았다. 겨우겨우 끼니를 잇는 형편에, 사제의 꿈을 갖기는 어려웠다.


어린 스테파노는 마음 속에 다른 꿈을 꾸었다. 장사꾼이 돼 작은 점포를 차려놓고, 스물다섯 되는 해에 여우같은 마누라를 얻어 토끼 같은 자식을 낳고, 굴뚝으로 밥 짓는 연기를 모락모락 피우며 사는 꿈.

그러나 주님은 스테파노를 사제의 길로 이끄셨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친척집에 간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대구로 간 스테파노는 그 길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어머니를 찾아 홀로 걸은 130리 길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스테파노가 사제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 1951년 사제품을 받은 후 어머니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김 추기경의 어머니는 김 추기경이 사제의 길을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불의에 굴할 줄 모르던 스테파노에게는 크고 작은 시련이 많았다. 특히 일제치하에서 보낸 신학교 시절은 고통의 길이었다.

조선총독부의 감시 아래 철저한 일제식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일본 유학시절 한국인이란 이유로 수많은 설움을 당해야 했으며,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가 목숨을 담보로 허공에 총부리를 겨눠야 했다.

나라가 없는 스테파노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정의감에 젊은 열기까지 더해져 나라를 빼앗은 일제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 자신의 안위 따윈 생각지 못했다. 동성상업학교 5학년 재학시절 수신(修身?지금의 윤리) 시험에서 수업과는 상관없는 문제인 “조선 반도의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일본 천황의 칙유를 받은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에 대해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적은 답안을 제출했다. 고통을 당할지라도 양심을 팔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스테파노에게 오히려 일본유학의 길을 열어줬다. 당시 동성상업학교 교장이었던 장면(요한,1899~1966) 박사와 대구대목구 무세 주교가 정의롭고 용감한 재목 스테파노를 알아본 것이다.

식민지 국가 신학생으로 일본 땅을 밟은 스테파노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고통당해야 했던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더욱 뼈저리게 맞닥뜨려야 했다. 징용에 나가거나 살길을 찾아 온 재일동포들의 아픔을 보며 민족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라는 생각으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고통과 번민의 날은 계속됐다. 피할 수 없이 날아든 학병 입영 통지서를 받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일본을 탈출하고자 갖은 애를 썼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결국 1944년 학병으로 입대했다. 일본 중부 나가노 부근 마츠모토에서 고된 훈련을 받으며 날마다 생각했다.

‘나는 왜 이곳에서 싸워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 총을 겨누란 말인가!’

그러나 사방에 무장한 일본군이 가득한 전장에서, 스테파노는 무력감을 느낀 채 2000톤급 화물선에 올라 태평양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동경에서 남쪽으로 약 1000km 떨어진 치지시마(父島)라는 섬으로 향하는 길, 그 망망대해에서 스테파노는 죽음의 골짜기를 넘었다. 미군 잠수함이 나타난 것이다. 어뢰가 날아든다면 모든 것이 끝, 십자가도 끝이리라. 담담해진 순간, 어디선가 찾아든 짙은 안개가 스테파노가 탄 배를 구했다. 사방이 안개로 둘러싸여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고 오직 한가지만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하느님께서 스테파노를 구하셨다!’

정의와 양심은 하느님의 것이다. 그것을 배반하는 것이란 십자가를 밟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었다. 스테파노는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조그만 배에 수류탄과 비상식량과 항복 표시를 위한 흰 천만을 넣은 채 학도병 몇 명과 작은 배에 올라탔다. 죽을 각오로 띄운 배였다. 높은 파도로 탈출계획은 무산됐지만, 정의와 양심 앞에선 목숨도 아깝지 않았던 스테파노의 뜨거운 마음은 그칠 줄 몰랐다.

마침내 해방이 찾아왔다. 이제 고통은 끝이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스테파노가 사제가 되는 길은 정



가톨릭신문  201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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