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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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24) 기쁜 소식_예수님 옷자락을 잡자

언제든지 ‘사랑’만 … 그것이 예수님 주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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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해야 천당 갈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천당 갈 수 있을까요?”

신자들에게 신앙 강의를 할 때마다 내가 즐겨 던지는 질문이다. 평범한 듯 하지만 사실상 신앙의 핵심을 관통하는 물음이다. 답은 천차만별이다.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행해야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

완전히 틀렸다고 할 오답이 어디 있겠으며, 오직 ‘이것’이라고 내세울 유일한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바람직한 답을 필두로 한 우선순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기준점을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첫 번째 예루살렘 강론에서 제시하였다. 성령강림 직후 3,000명이 넘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복음 선포를 했을 때, 마음이 찔린 청중들이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37)

베드로 사도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사도 2,38-39).

이로써 사도 베드로는 바야흐로 ‘율법’의 시대, 곧 착하게 살아서 천당 가는 시대는 지나갔고, 대신 ‘믿음’의 시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천국의 시민이 되는 시대가 왔음을 선포한 셈이다.

놀라운 은혜다. 자력으로 천당에 가지 못하는 사람도 이제 예수님의 공로(십자가에서 바치신 살과 피의 제사)에 힘입어 구제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그 ‘기쁜 소식’의 전말을 확인해 보자.

■ 기쁜 소식

예수님이 첫 번째로 선포하신 것은 복음, 곧 ‘기쁜 소식’이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복음 이전의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인간이 낙원을 상실하고 신음하는 현실이 예수님 오시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이는 오늘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상황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낙원 상실의 상황이라는 건 무엇인가. 죄와 죽음의 결과에 의해서 신음하고 있는 인간 현실이다. 이 죄라는 것은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왜곡하고, 남용하여 생기는 부작용들이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뜻하신 바가 있었다. 그것을 사용설명서에 잘 적어 놓으셨는데, 인간이 그대로 따르지 못했다. 그래서 고장이 나고, 부작용도 생겨났다. 여기에는 고통과 좌절과 절망 등의 현실도 포함된다. 그분의 사용설명서와 어긋나니까 뜻대로 안 되는 것이다.

그러한 여러 가지 슬픈 현실이 지금 복음이 선포되는 배경인 것이다. 이를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상선벌악의 현실’이다. 이 상선벌악은 우리에게 구원인가, 절망인가? 만약 “이 이치에 따라 천국 갈 자신 있는 사람 손드세요!” 하는 말을 듣는다면, 대부분 사색이 될 것이다. 다들 자신이 없다. 거의가 다 탈락자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다!” 하고 말하면, 이는 무슨 뜻인가. “탈락자들도 구원받을 길이 열렸다. 때가 차서 하느님께서 용서하기로 하셨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예수님 가르침은 주구장창 용서, 용서, 용서다. 얼마나 예수님께서 용서에 방점을 두셨는지, 부활하신 다음 첫 번째 말씀도 용서였다. 제자들에게 숨을 탁 불어넣어주시면서 “가라, 가서 용서해 줘라!”(요한 20,23 참조)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그러기에 복음은 이 냉엄한 상선벌악을 능가하는 용서의 기쁜 소식인 것이다. 그러니 보통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어. 다들 와! 다들 내가 데리고 갈 테니까”(마태 9,13 참조).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은 기쁜 소식 이외에도 당시 사람들의 관심사를 두루 아우르는 명쾌한 처방을 주셨다. 예수님 가르침의 스펙트럼은 무한대로 열려 있다. 하지만 그 가르침의 목적은 동일하다. 바로 ‘자유’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정말 그런가? 어떤 사람은 이 말씀에 이런 대꾸를 한다. “잘 알겠는데요, 실천이 안 되네요.”

그럼 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해 준다. “제대로 알지 못해서 실천이 안 되는 겁니다.”

제대로 알면 실천이 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진리를 올바로 깨달으면,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저 말씀은, 우리의 특권이고 성경을 읽는 이들의 특권이다.

그렇다면 왜 진리는 자유를 주는가? 소크라테스는 자유를 이렇게 정의 내렸다.

“자유라는 것은 최선을 인식하고, 최선을 행하는 능력이다.”

그의 말마따나 우선 자유로우려면, ‘최선’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자유로워도, 수박 고르는 데는 수박 장수보다 자유롭지 못하다. 그 분야에서 최고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수박 장수다. 자기가 맛있는 수박을 고르고 싶으면, 가서 툭 쳐보면 안다. 우리가 암만 자유를 가지고 가서 잘 고르고 싶어도 수박 장수만 못하다. 경험이 없고, 아는 게 없으니까. 고를 자유는 있지만, 결국 맛있는 걸 골라내서 먹는 자유까지는 못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 몇 가지만 함께 헤아려 보자.

우선,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정신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율법뿐 아니라 모든 예언서의 골자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요약하신 분이 예수님이다(마태 22,36-40 참조).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율법 교육의 혁신을 보게 된다. 예수님이 딱 보니까 사람들이 율법에 대해 자꾸 헷갈리고 복잡해 하는 것이었다. 원래 주어진 건 10계명인데, 여기서 법률학이 발달하다 보니 새끼를 치고 또 새끼를 쳐서 613개가 되어 사람을 옭아맸다. 살다 보니 이 조항에 걸리고 저 조항에 걸려서 도저히 앞을 못 나간다.

이에, 예수님은 이 613개 조항을 10계명으로 딱 줄이시고, 이 10계명도 많다 하시어 그 계명 중에 제일 큰 계명 2개만 지키라 하셨다. 바로 ‘하느님 사랑하기’와, ‘이웃을 내 목숨처럼 사랑하기’다. 이 2가지를 지키면 10계명을 지킨 것과 똑같다는 것이었다.

결국, 예수님은 이마저 1개로 줄여주셨다.

“하나만! 언제든지 ‘사랑’만 생각해! 누구를 대하든지. 그러면 되지 뭐!”

613-10-2-1! 이렇게 줄이고 줄이



가톨릭신문  201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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