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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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30) 시공에 새긴 말씀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 밝히는 엑기스, ‘가상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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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적 한 말씀

일반 대학을 다니던 학창 시절 내 주위에는 개신교 신자들이 많았다. 어쩌다가 신앙 얘기를 나누게 될 때면, ‘장마다 꼴뚜기’처럼 등장하는 주제가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성모님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성모상, 그거 우상숭배 아냐?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지 왜 굳이 마리아한테까지 기도해야 하냐구?”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나는 성모님을 신(神)으로 여기지 않으니 결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설명을 해 준 다음, 반드시 요한 복음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성경이 있을 경우엔, 이 말씀을 함께 읽게 한 후, 친절하게 그 엄청난 함의에로 인도해 준다. 요지는 이렇다.

“자, 봐라. 지금 이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냐. 인류구원의 대업을 이루는 절체절명의 순간! 바로 그 순간인데, 그동안 친인척 관리를 칼 같이 해왔던 예수님이 사사롭게 어머니 노후가 걱정되어서 챙겨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셨을까. 그게 아니지.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에게 제자들로 대표되는 교회를 돌봐 주시기를 맡기셨던 거야. 그리고 교회에게는 성모님을 잘 공경하면서 ‘여인 중에 복되심’의 특은을 누리도록 분부해 놓으셨던 거고….”

희한하게 말씀을 근거로 답변을 하면 상식이 통하는 개신교 신자들은 대체로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지금도 나는 교회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성경적 근거는 방금의 저 말씀이라고 여긴다. 이 말씀이 특별한 권위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 발설된 예수님의 유언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 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말씀

한 인물을 기억할 때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을 기억하게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다. 이름하여 가상칠언(架上七言)이다. 이는 십자가의 엑기스다.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 십자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결정적인 문장들이다. 하나씩 그 핵심을 헤아려 보자.

1.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십자가에서 못 박고 있는 병사들을 향한 기도다. 그 병사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는가. 결정은 위에서 한 것인데. 그래서 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미움을 척결하고 결국에는 용서를 완성하신 분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사형 선고를 내린 재판관을 비난하거나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완벽한 결백이신 그분은 용서를 청하시지 않고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용서의 기도를 바치셨다.

2.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청한다. 그는 말한다. “이 다음에 왕이 되어 다시 오실 때, 저를 기억하여 주세요. 당신은 메시아십니다. 제 얼굴을 똑바로 봐주세요. 그래도 인연이 있다면 당신하고 난 십자가 동기 아닙니까? 나중에 저를 꼭 좀 아는 체 해 주세요.”

이것이 그 도둑의 마지막 기도이자 첫 기도였을 것이다. 그는 단 한 번 문을 두드렸고 단 한 번 찾았고 단 한 번 부탁했다. 그는 감히 ‘모든 것’을 요구했다가 모든 것을 얻었다.

예수님은 저 말씀으로 이 세상 마지막 날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가려내게 될 최후의 임무를 앞당겨 실행하신 것이다. 이는 우리를 위한 최고의 복음이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더 늦은 시간은 없다”는 최종선언이기 때문이다.

3.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여기서 예수님은 ‘다른 제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에게 인류의 대표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곧 그 제자는 다름 아닌 ‘인류’를 대표하여 ‘어머니’를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더 상세한 묵상은 서두의 것으로 대신한다.

4.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나는 예수님의 이 절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절망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절망이다. 나는 확신한다. 적어도 이 고백의 순간만큼은 성부 하느님하고 예수님하고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었음을. 나머지 경우 조금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 있다. 성부 하느님이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며 “네가 가서 고생 좀 해라. 내가 다 도와줄게. 성령으로 도와줄게. 죄 있는 사람 용서해 주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푼 거고 그렇단다!” 등등. 성부 하느님의 계획이 있고 소통이 있고 다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순간만은 성부 하느님이 성자 예수님에게 아무 귀띔도 주시지 않은 순간이었다. 예수님의 저 말씀은 왜 나왔는가. 여태까지 동행하던 성령이 안 보이고, 여태까지 내려다 보시던 하느님의 눈이 안 보이고, 하늘을 딱 보니 어둠뿐이다. 그 순간 예수님이 느낀 것은 하느님의 부재와 단절이었다. 당신편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순간적으로 절망에 빠지신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와 함께 하던 성부 하느님 어디 가시고, 연락이 끊기고!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세상은 나를 버려도 당신은 나를 안 버리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제가 여기까지 왔는데 말입니다.”

이 절망은 세상에서 어느 누구의 절망보다도 깊은 절망이다. 예상하지 못한 절망이다. 그래서 이 절망은 오늘 이 시대 절망한 자를 위한 절망이다. 그러기에 이 예수님을 만나면, “내가 더 이상 살지 말아야겠다”와 같은 헛된 결심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말씀으로 힘을 얻는 것이다.

5. “목마르다”(요한 19,28).

영혼의 고통에 대한 부르짖음에 이어 이번에는 육체의 고통을 표현하신다. 채찍질과 고문을 통해 이미 쇠진하신 몸으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신다.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시는 그분께서 “목마르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비극은, 어쩌면 신체적 갈증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이었을지도 모를 주님의 이 말씀에, 사람들이 주님께 식초와 쓸개를 드렸다는 것이다.

6.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주님은 역사를 통해 세 번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첫 번째는 ‘창조의 완성’에서 두 번째는 묵시록에서 ‘새 하늘 새 땅이 창조될 때’를 나타내면서 사용하셨다. 시작과 끝날의 완성,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지금 이 말씀이 그 둘을 연결해 주고 있다. 치욕의 극치 속에서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으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들이 이루어졌다고 주님은 탄성을 지르신 것이다. 주님은 많은 사람의 죗값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기에 십자가 죽음에서 당신 일이 완성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7.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죽음을 인생에 있어서 가장 두려운 순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을 하게 된 ‘기쁨’을 이해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주님의 죽음은 인간에 대한 봉사요,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목숨을 바치며 드리는 순간에 올리는 이 기도야말로 ‘가장 완전한 기도’일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가상칠언’은 입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었다. 입술을 통하여 나왔지만, 가슴에서, 심장에서, 저 영혼 깊은 곳에서 올라온 그분의 속내였다. 거기에는 그분의 존재가 송두리째 실려 있었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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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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