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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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61) 입술로 아멘

‘아멘’ 고백, 먼저 입으로 하는게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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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한 말의 법칙

얼마 전 모방송 TV에서 ‘천금말씨’라는 제목의 특강 시리즈 녹화를 마쳤다. 여기서 ‘말씨’는 “말하는 마음가짐과 태도”라는 사전적 의미와 함께 “말이 씨가 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까. 여기에는 아예 법칙이 있다. 어느 인디언들에게는 “2만 번 이상 말하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많은 경우, 인디언들은 우리에게 번득이는 지혜를 가르쳐 준다. 그들의 주장은 대부분 체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의 신뢰도가 높다. 이를 바탕으로 자기계발분야에서는 ‘1만 번의 법칙’을 내세운다. 같은 말을 1만 번 이상 반복하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어느 말이 맞는지 숫자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2만 번이든 1만 번이든 그 정도로 반복할 것을 권유하기 때문이다.

반복된 말의 효과를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이 ‘아브라카 다브라’다. 무슨 주술문인 것처럼 흔히 알고 있지만, 그 기원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히브리어 ‘아브라카 다브라’는 “말하는 대로 된다”는 뜻이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단어는 ‘말하다’를 뜻하는 ‘다바르’ 동사다. 교양 공부 삼아 이 말뜻을 헤아려 보자. 성경에서 ‘다바르’의 힘은 무한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한다. 하느님이 “빛이 생겨라”라고 ‘다바르’했더니 빛이 생겨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것들도 ‘다바르’를 통해 같은 형식으로 창조된다. 글자 그대로 ‘아브라카 다브라’, 말하는 대로 된다! 이렇듯이 말은 창조력을 지닌다.

말은 또한 성취력을 지니고 있다. ‘아브라카 다브라’는 말이 지닌 성취력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 말의 기원은 성경이다. 민수기 13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진입하기 전, 모세가 각 지파 대표 12명을 정탐꾼으로 보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와 보고한 내용이 둘로 갈린다. 원주민 거인족에 압도되어 스스로 ‘메뚜기’로 낮춰 부른 그룹과 그들을 ‘밥’으로 부른 이들, 이렇게 상반된 입장으로 나뉜 것이다. 이에 따라 백성들도 두 패로 갈렸는데, 종국에는 그들을 ‘밥’으로 선포한 이들의 일행만 마침내 가나안 땅을 밟게 된다.

놀라운 얘기다. 자신들을 ‘메뚜기’로 부른 사람들은 결국 그 꼴이 되었다. 적을 ‘밥’으로 부른 이들은 말한 대로 승리했다.

여기서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한 결론이 내려진다.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민수 14,28).

줄여 말하여, ‘아브라카 다브라’, 말하는 대로 된다!

이점에 있어서 말은 비정하다. 인정사정 봐주는 것 없이 그 열매가 반드시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핵심은 우리가 평소 쓰는 말을 긍정의 언어로 바꾸라는 얘기다. 말뿐이 아니다. 노래도 그렇다. 음악 하나를 들어도 자꾸 슬픈 것만 듣는 사람이 있다. 가사도 슬픈 것만. 이런 사람에겐 점점 슬픔이 강화된다. 왜, “가수는 자기 노래대로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로써 성가를 자주 부르는 것이 우리 영혼에 유익이 된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성가를 자주 부르면 그 은혜로운 노랫말들이 우리 내면에 체화된다. 그것들이 저절로 내면에 차고 넘치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 예수님의 별난 이벤트

차제에 말의 효력에 대한 예수님의 별난 이벤트에 우리의 시선을 모아보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아침 일찍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예수님은 뜬금없이 무화과나무에 다가가셨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마르 11,14).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 이유가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마르 11,13)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런데 아무 탓도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예수님께서는 저주를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은 이 무화과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다가, 오후에 다시 그 길로 내려오신다. 그 때 아침에 본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있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말했다.

“‘스승님, 보십시오. 스승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마르 11,21).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나무는 열매가 없어서 저주받았다. 그러니 너희도 열매 없으면 저주 받는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 11,22-23).

그러니까 이 사건은 누구든지 자신이 가진 말의 권세를 믿고 말하고, 그 말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연출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만이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실로’라는 강조법을 사용하시면서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엄밀히 말해서 하느님을 믿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누구든지’를 가리킨다. 믿는 이의 말이 지니는 특권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 아멘 하자

지금 우리는 ‘아멘’에 대하여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이 ‘아멘!’ 하나에 앞에서 장황하게 소개한 말의 권세가 집결되어 있다. 그러니 ‘아멘’ 하려면 먼저 입술로 시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혹시 이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 그냥 속으로 믿으면 됐지, 뭘 그렇게 요란을 떨라고 합니까?”

입으로 해야 한다. 하느님이 듣지 못하셔서 입으로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워낙 변덕스럽기에 입으로 얘기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속으로 마음먹은 것도, 자신이 말해놓고도 잊어버리기 십상이니 말이다.

하느님은 원래 청하지 않은 것에도 응답을 주신다. 그런데 청해놓고도 잊어버리는 인간이 하느님의 응답을 못 알아보고, 자꾸 엉뚱하게 반응하거나 오리발 내미니까, 이제는 청한 것만 응답을 주시는 것이다.

입술로 ‘아멘’을 고백하는 것이 좋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말의 힘 때문이다. 우리가 입으로 무슨 말을 하든, 결국 우리의 현실로 이루어진다.

“아이고, 지겨워. 아이고, 죽겠다. 아이고, 내 팔자야”라는 말을 매일 달고 다니는 사람은 점점 꼬여서 잘 되던 일도 망한다.

반면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말을 계속 하는 사람은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난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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