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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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62) 아멘과 기도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느님의 날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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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에 관한 금언(金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 요한 금구(金口)란 별명에 걸맞게 명문장, 명설교로 유명한 성인이다. 연구 목적으로 교부들의 문헌을 뒤지던 중 어쩌다 성인의 문장을 만나기라도 하면, 나는 일부러 더 오래 음미하곤 한다. 문장의 호흡과 열정이 마치 성령의 불길처럼 화끈하게 와 닿기 때문이다. 그는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다.

“기도란 도시의 벽이고, 군인의 칼이며, 폭풍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 또 절룩이는 사람에게 다리가 되어 주는 목발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명불허전. 과연 금구(金口)다. 단 한 문장으로 기도의 역할을 웅변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몇 해 전 터키·그리스 성지순례에 갔을 때 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성당에 들른 적이 있었다. 기회다 싶어 다들 다른 곳에 정신 팔려 있을 때, 나는 “손대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슬쩍 유해가 안치된 함 뚜껑에 손을 얹고 사진 한 방을 찍게 했다. 그 순간 기도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이시여, 비슷한 소명을 받은 저를 위해 빌어 주소서. 성인께서는 불같은 글과 강론으로 난세에 복음을 전하시어 불세출의 목자가 되셨으니, 저에게도 그 영검이 함께하도록 성령을 전구하여 주소서.”

그 기념비적인(?) 사진은 지금 연구소 필자 방 한 켠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건 그렇고, 우리는 과연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가르친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온전한 빛 속을 걸어가며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저는 인간이고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일이다. 바로 그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이는 무슨 말인가? 기도란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약하고 당신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다 할 수 있습니다”를 고백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헨리 나우웬의 강조점은 그다음 문장에서 부각된다. 그는 단언한다.

“인간은 가끔 실수를 저지르는 존재가 아니고, 하느님 역시 가끔씩 용서를 베푸는 창조주가 아니다. 인간과 하느님의 정의가 잘못됐다. 인류는 총체적으로 죄인이며 하느님은 총체적으로 사랑이시다.”

그의 말은 옳다. 인간은 잠시, 가끔만 나약하고 죄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총체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늘 부족하고, 항상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총체적으로 사랑’이시기에 항상 차고 넘치시며, 아낌없이 베푸신다.

한마디로, 인간은 기도 없이 살 수 없고, 기도 덕에 사는 존재다. 그러기에 ‘아멘’은 인생의 후렴구다.

■ 절박한 기도로서 ‘아멘!’

이 번 글로써 ‘아멘’ 시리즈 네 번째가 된다. 그 짧은 단어 아멘의 속뜻은 이처럼 다채롭다.

어떤 때는, 절박한 기도 자체가 ‘아멘’이 된다. ‘명령어’ 기도가 과격해 질 때 내용적으로는 ‘아멘’이 된다는 얘기다.

시편 17편에 등장하는 다윗의 요청은 명령문으로 되어 있어 언뜻 보면 마치 하느님께 명령을 내리는 듯하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윗사람에게 사용하는 명령문은 무례함이 아니라 존경과 위엄을 뜻한다.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시편 17,8).

다윗은 겸손히 하느님의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 일어나소서. 다가가 그를 내던지소서”(시편 17,13)쯤에 이르면 하느님을 재촉하는 듯하다. 다윗이 감히 하느님께 명령하는 것이다. 번역을 점잖게 해서 그렇지 “급하니까 빨리 어떻게 좀 해 줘요!”라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한밤중에 어린아이가 잠에서 깨면 불현듯 겁에 질려 엄마, 아빠를 찾는 경우는 흔하다. “엄마, 아빠! 어디 있어? 일어나!”

이는 오만함이 아니라 절박함에서 나온 것이다. 이 명령어 속에는 이미 ‘아멘’이 포함되어 있다. 급하니까 하느님께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짧고 강하게 SOS를 치는 것이다.

■ 하느님의 날인, ‘아멘!’

우리가 하느님께 “아멘” 하기도 하지만, 하느님도 우리에게 “아멘” 해 주신다. 이런 아멘은 하느님의 날인이다. “하느님, 이것 좀 해 주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라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아멘’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멘! 그 황홀한 아멘을 모세가 들었다.

“내가 보았고, 들었고, 알고 있다”(탈출 3,7 참조).

여기서 ‘알고 있다’라는 말에 느낌이 팍 오지 않는가. 오늘 이 시대에도,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 모양새로 어디선가 고통 받는 이들이 있다. 하느님은 그들의 소리를 ‘지금’ 듣고 보고 알고 계신다. 그러시곤 이제 개입을 하신다. 그것이 엑소더스, 곧 이집트 탈출이었다.

구약의 히즈키야 왕은 병에 걸려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2열왕 20,3).

이에 하느님이 이렇게 아멘 해 주셨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이제 내가 너를 치유해 주겠다”(2열왕 20,5).

히즈키야는 저 말씀대로 치유 받았다.

우리는 왜 기도하는가?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소위 ‘푸닥거리’란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와는 차원이 다르다. 무엇이? 바로 ‘약속’이다.

푸닥거리는 약속 없는 기도다. 그러기에 기도하는 이는 ‘을’의 입장이 된다. 아무리 해 봐도 받는 쪽에서 준다고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안 주면 그만이다. 그래 거절당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성경에서 당신에게 불리한 말씀을 엄청 해 두셨다. 재판이라도 걸면, 하느님이 다 질수밖에 없다. 청하는 건 다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네 입을 한껏 벌려라, 내가 채워 주리라”(시편 81,11).

맨 약속 투성이다.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

그러니 우리는 이 말씀 붙잡고 “준다고 그러셨잖아요! 주세요! 약속 지키세요!” 하면 된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뭔가? 바로 하느님의 ‘헤세드’(chesed)다. ‘헤세드’는 일반적으로 ‘자비’라는 뜻이고, 궁극적으로 “당신 약속에 충실하시다”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이 자비롭다”라는 말엔 “하느님은 약속에 충실하시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기에 주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우리의 기도에 ‘아멘!’ 하고 들어주시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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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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