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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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71) 8가지 참 행복 - 온유기도를 바치자

평화를 얻으려면 온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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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말라야 삼목의 생존지혜

캐나다의 퀘벡에는 긴 산맥이 있다. 이 산맥은 동쪽과 서쪽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서쪽에는 여러 나무들이 울창한 반면 동쪽에는 오직 히말라야 삼목만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기이한 경관은 사람들에게 줄곧 수수께끼였다.

이 태고의 수수께끼는 한 부부에 의해서 풀렸다. 1983년의 어느 겨울날, 결혼 생활이 위태로워진 부부는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여행을 하기로 했다. 만약 여행을 통해 변화가 없으면 과감히 헤어지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큰 눈이 내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아내가 놀란 듯 목소리를 높여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 알겠어요. 왜 동쪽에는 히말라야 삼목 외에는 살 수 없었는지.”

“동쪽의 히말라야 삼목은 적당히 휘어지기 때문이에요. 동쪽은 눈이 많이 오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 휘어질 줄 모르는 나무는 결국 부러지거나 꺾여서 죽고 말았던 거예요. 서쪽은 당연히 눈이 적고 바람이 많이 불지 않으니 다른 종류의 나무들이 살 수 있었던 거고요.”

이 말과 동시에 두 사람은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다 뜨겁게 포옹했다. 남편이 말했다.

“그동안 내가 잘못했소. 나는 내 고집만 부릴 줄 알았지, 당신 생각을 받아들이고 양보할 줄을 몰랐소. 내가 휘어질 줄 몰랐기 때문에 서로 힘든 시기를 보냈던 거요.”

아내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나 역시 나만 알아달라고 했던 걸요. 우리 이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휘어질 줄 아는 부부가 되기로 해요. 그럼 적어도 서로의 고집만 피우다 부러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히말라야 삼목은 휘어질 대로 휘어져서 하중을 견뎌 생존하였다. 이 삼목처럼 휘어져서 기운을 흐르게 하는 사람이 최후의 생존자가 된다. 이들은 비굴한 게 아니라 부드러운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이다. 이들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 우리를 구원한 온유

온유를 통해서 인류의 구원이 왔다. 온유는 순명이다. 우선, 성모 마리아가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으로 초대받았다. 요셉과 약혼한 상태였던 마리아는 남자를 모르는 여자였는데, 하루는 천사가 느닷없이 나타나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요즘 표현으로 자신은 ‘미혼모’로, 아이는 ‘사생아’로 몰릴 것이 뻔한데도, 마리아는 온유의 답변을 하였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루카 1,38 참조)

이 순명의 고백으로 인류의 구원이 시작되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셨다. 사실 예수님도 육신을 입은 몸이었기에 박해가 고통스럽고 죽음이 두려웠을 터. 그래서 피땀을 흘리시며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라고 절규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온유의 기도를 바치셨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이로 인해 결국 구원이 완성되었다. 이 기도를 통해 인류의 구원이 온 것이다.

■ 온유의 영성

‘온유의 영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온유는 바로 순명을 뜻한다. 순명은 하느님의 지혜가 자신의 지혜보다 높다는 것을 알기에 기꺼이 그분 명령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이때 온유는 부드러움을 통해서 강함을 드러낸다. 가장 온유한 사람이 가장 힘 있는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이 가장 위대한 일을 한다.

이는 현대적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인이 갈구하는 카리스마와 리더십의 비밀이 바로 온유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한 똑똑 하는’ 사람과 ‘한 성격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이들은 잘해 봤자 자신의 역량만을 발휘할 뿐이다. 하지만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통해서 무한지혜와 무한능력이 흐르기 때문에 무한대로 간다. 이를 깨달아야 한다.

나 자신을 성찰하건대 내 뜻은 생각이 짧고 또 나는 능력도 시원찮다. 그런데 온유를 통하여 내 안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엄청난 지혜와 능력도 흐르게 된다. 신비 그 자체다.

또한 평화를 얻으려면 온유해야 한다. 예수님은 평화를 얻는 비결로 온유를 제시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29).

우리는 대부분 분주하고 힘들고 평화롭지 못한 삶을 산다. 고생하고 수고하며 산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너희가 내 멍에를 메고 내 온유를 배우면 평안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명처방이다. 고생과 짐 대신에 ‘멍에’를 메라고 하셨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고생’과 ‘무거운 짐’, 여기에 대비가 되는 것이 ‘멍에’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온유와 겸손’이다. 그러니까 ‘고생’과 ‘무거운 짐’은 온유하지 않은 사람 곧 ‘내 뜻’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반면에, ‘멍에’는 스스로 지지 못한다. 누군가가 지워준다. 그렇기 때문에 ‘멍에’는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아버지 뜻’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멍에를 지는 것은 바로 ‘온유’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난리법석을 떨고 내팽개친다. 온유가 바로 열쇠인 것이다.

사람들이 평안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 뜻대로 살기 때문이다. 사업을 한다고 치자. ‘내 뜻’에 집착하는 사람은 스케줄이 안 맞고 계획대로 일이 안 되면 잠도 안 오고 성질도 내기 다반사다. 이는 자기 뜻만 고집하는 사람들이 겪는 현상이다. 하지만 그럴 때 ‘내 뜻’ 대신에 ‘멍에’ 곧 ‘아버지의 뜻’을 지고 살면 삶의 차원이 확 달라진다.

내가 내 뜻만을 내세우며 스스로 짐을 지고 살아가자면 아등바등 너무 힘들다. 마음가짐이 안절부절 못하고 조바심이 나고 잠이 안 온다. 결과에 대해서 불안한 것이다. “잘 되어야 되는데, 잘 되어야 되는데” 하고 말이다.

한편 아버지가 지워주는 멍에를 메고 살면 마음이 편하다. 말아 잡숴도 좋고 삶아 잡숴도 좋고 망해도 좋고 흥해도 좋고…. 아버지가 지워주신 것이니까 아버지가 결과를 책임지지 않겠는가.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있으니까 망해도 좋은 일이 일어나는 거고 흥해도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것이 짐이 아니라 멍에로 전환되는 순간 위대한 반전이 일어난다. 짐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평화가 임하는 것.

이를 진즉부터 묵상해왔던 나는 ‘온유기도’를 잘 바친다. 잠이 안 오고, 걱정이 태산일 때, 나는 이렇게 온유의 기도를 바친다. “에이 난 몰라요! 저 그냥 잘래요. 주님이 다 알아서 하세요!” 그러면 마음이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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