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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 응답하라 2014 한국교회 (9·끝) 하나 되게 하소서

‘퍼주기’란 말에 밀려선 안돼… 한반도 평화는 교회 필수과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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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의 권력자들에게 잡히기 전 성부께 바친 기도는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믿는 이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분신임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사람임을 드러내는 일이다.



민족화해와 일치를 향한 우리 겨레의 여정에서 한국교회는 누구도 넘보기 힘든 큰 봉우리였다.

1995년 북한을 휩쓴 대홍수와 그에 이은 대기근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민족화해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도에 나서도록 이끌었다. 색깔론과 온갖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속에 고(故) 김수환 추기경으로 인해 트인 화해의 물꼬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민족화해 역사에 선구자로 우뚝 서게 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민족화해를 위한 교회의 통일사목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수면 깊숙이 가라앉아 언제 다시 떠오를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모습이다.

통일은 우리 민족에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에 통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이를 바탕으로 한 준비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하지만 통일은 우리 민족의 오랜 소망이자 해묵은 숙제에 머물러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통일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접근은 더 큰 앙금만을 남게 했고, 경제논리에 따른 접근은 통일에 대한 의식 약화를 불러왔다. 이는 그리스도 정신이 세속의 경제주의, 색깔론에 자리를 내주면서 빚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뤄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교회 공동체를 뛰어넘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여정에도 큰 기대를 안겨주고 있다. 민족 분단의 아픔이 더해가고 절망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뤄지는 교황의 방한은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역사에서 새로운 교두보를 마련해줄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교회가 개척해나가고 있는 민족화해의 여정을 되짚어본다.

한국교회 민족화해 노력

한국교회가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65년 6월 주교회의가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를 바치기로 결정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과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은 목마름에 지쳐 스러져가던 민족화해 여정에 마중물이 되어주었다. 이 기념해를 계기로 사회적으로도 통일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면서 교회는 민족화해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1982년 2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북한선교부’가 신설되고 1985년에는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가 출범한다. 특히 1989년 문규현 신부의 방북은 교회는 물론 온 겨레가 통일문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지평을 열어놓았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공식적 대북 접촉은 1987년 장익 신부(전 춘천교구장)가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협력에 관한 비동맹국가 각료회의’에 바티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것이 최초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북한에서는 조선천주교인협회(현 조선카톨릭교협회) 결성, 장충성당 건립 등이 이뤄졌고 박창득 신부 등 북미주 교포 신자들의 방북도 이뤄지게 됐다.

이어 해방 50돌이던 1995년 3월 서울대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민족화해·일치 운동은 새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특히 그 해에 북한에 큰물 피해와 가뭄으로 인한 기아가 만연하면서 민족화해 여정은 결정적인 분수령을 맞이한다. 당시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북한에 첫 지원금 8000만원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전달하고 본격적인 대북 지원에 나섰다. 그 해 10월 미국 뉴욕에서 서울 민화위 대표단과 조선천주교인협회 관계자들이 만나 ‘조국 통일을 위한 천주교인의 연대 강화’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면서 남북 교류에 새로운 활로를 마련하게 된다.

또 교회가 나서 1995년 10월 ‘범종단 북한수재민돕기 추진위원회’를 구성, 북한 수해 복구를 위한 대북 인도적 지원의 물꼬를 트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96년 4월에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통일 기원미사’가 남북한에서 동시에 봉헌되기도 했다. 이어 1997년부터 남북 종교교류를 주도해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를 구성, 3.1민족대회를 이끌어내는 등 민족화해와 협력 증진에 기여했다.

1996년 사랑의 국수나누기운동으로 본격화하기 시작한 북녘 형제들을 향한 한국교회의 몸짓은 평양 국수공장 건립(1996년), 북한동포를 위한 국제 단식 모금운동(1997년), 북녘 형제 돕기 국수나누기운동(1998∼2000년), 겨울 옷 보내기운동(1998년 12월)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되며 반세기 넘게 뇌사상태에 빠져있던 한반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모색을 통해 북한에는 한국교회가 지원하는 옥수수 밀가루 등 수많은 식량과 분유 의약품 농기구 국수기계 차량 등이 전해져 민족화해 여정에 밑거름이 됐다.

2004년 북한 룡천역 열차 사고 때도 한국교회는 특별모금운동을 실시했으며, 2005년 대북농업 개발사업 ‘씨감자 무균종자 배양시설’ 건축을 도우며 통일 기반 마련에 힘을 쏟았다. 2006년에는 국제 카리타스 대북지원 사업대표 실무기구로 위임되고 다음해인 2007년에는 통일부 대북지원 사업단체로 지정돼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우리 민족의 여정을 이끌어오고 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교회 공동체를 뛰어넘어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여정에도 큰 기대를 안겨주고 있다. 사진은 ‘2012 세계 평화의 바람’ 참가자들이 휴전선 철조망에 희망을 적은 리본을 달고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를 바치고 있는 모습.
 
남북 교류, ‘퍼주기’인가 ‘사랑 실천’인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향한 여정에서 ‘퍼주기’라는 용어만큼 공동체 구성원 간 인식 차를 드러낼 뿐 아니라 갈등을 빚어낸 말도 없을 듯하다. 해방 50돌을 맞이하던 1995년 북한의 큰물 피해와 가뭄으로 초래된 참담한 기아 사태는 북한 정권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던 국제사회는 물론 오랫동안 총칼을 들이대고 으르렁거리던 남북 간에도 생명의 물이 흐르게 했다.

하지만 순수한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형제애의 발로로 이뤄진 식량 중심의 대북지원은 ‘퍼주기’라는 말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더 이상 ‘색깔론’이 쉽게 먹혀들지 않는 현실에서 등장한 이 용어는 아직도 분단의 아픔과 앙금을 지니고 있는 이들의 혼란을 부추겼다.



가톨릭신문  201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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