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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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신앙체험수기] 특별상-단 하나의 노을빛 사랑

박온화 (루치아, 서울대교구 상계2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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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은 하느님 말씀에 촉촉이 젖으며 예쁜 손 모아 기도하는 풀꽃이었다. 살을 에는 한겨울에 1시간씩 파르르 떨며 성당엘 가도 추운 줄을 몰랐다. 교중미사에서 방울새 소리로 “우리 교황 위하여” 내가 선창하면, 교우들이 “기구하나이다”를 함께 합창했다. 나는 이슬처럼 맑은 성가가 좋아서, 예수님 성모님께 드리는 노래를 방울처럼 울리고 다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후 친정엄마는 7남매를 홀로 키우셨다. 시장 좌판에서 세상인심처럼 꽁꽁 언 고등어를 도끼 칼로 내리치며 생선 장사를 하셨다. 어둠이 깔린 부엌에서 검게 부어터진 손등으로 소주잔에 흐느끼던 엄마의 등은 내 가슴에 꼬부라진 지팡이로 박혀있다. 고달픈 엄마를 지켜준 건 묵주 기도였다. 몸의 지체인 양 팔걸이엔 차랑차랑 알알이 묵주가 항시 붙어 다녔다. 엄마는 어떤 처지에서든 항상 감사드렸다.

2년제 교대를 졸업하고 어린 시절 꿈꾸던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고개 숙인 할미꽃 아이들의 속마음에서 반짝 빛나는 황금 별꽃을 보았다. 아이들이 밝게 웃을 수 있도록 ‘시와 노래가 있는 교실’을 표방했다. 아이들처럼 해맑은 동심의 옷을 입고 운동장으로 동산으로 웃음소리를 따라 뛰어다녔다. 교사 시절만큼 정직하게 보람을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혜화동 가톨릭 학생회관 기타강습에서 처음 내 품에 안긴 기타에 푹 빠졌다. 어쿠스틱 기타와 애인여기(愛人如己, 남을 사랑하기를 제 몸처럼 사랑함)하며 잠재적인 음악 소질과 넘치는 열정은 찰떡궁합으로 달라붙었다. 안성맞춤으로 최고의 취미와 특기를 소장한 데다 노력과 끈기가 합세해 기타 코러스의 창단 멤버가 되었다. 각종 콘서트와 위문활동 공연에 주님 신비의 기쁨을 선사했다.

당시 1970년대는 유신 체제에 항거하는 학생들 시위가 거세졌고 급기야 긴급조치가 발표됐다. 젊은이들의 집회가 금지되었다. 기타 코러스 공연을 앞둔 시점에서 벽에 붙은 콘서트 포스터가 찢기고 연습 등의 모임도 제한됐다. 초등교사 겸 현역 대학생 기타 코러스의 선배로서 지휘자인 나와 임원들은 해결책을 찾았으나 묘안이 없었다. 모두 실의에 빠졌다.

그때였다! 기적처럼 구세주가 나타났다. 가톨릭 학생회관 청소년지도국에 새로 부임한 간사, 지금의 남편인 베드로가 경찰서 등을 다니며 초인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의 순수 음악공연은 반드시 성사돼야 함을 끝까지 설파한 끝에 공연 허가를 받아냈다. 감동을 안겨준 그가 바로 주님의 수제자 ‘반석’이라 일컫는 ‘베드로’임에 남몰래 흠모했다.

공연 후부터 베드로와 사랑이 깊어갔다. 결혼도 약속했다. 11살 위인 베드로는 당시로는 나이도 많고 가정 형편도 어려운 장남이었다. 내겐 문제되지 않았지만, 엄마와 세 오빠들은 고생길이 훤히 보인다며 결혼을 반대했다. 우린 절대 헤어질 수 없었다. 기도밖에 없었다. 앞으로의 결합을 위해 만남도 포기한 채 베드로는 불광동성당에서, 나는 청량리성당에서 매일 새벽 미사에 간절히 빌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있을까. 드디어 엄마는 결혼을 허락해주셨다.

결혼은 꿈이었을까. 행복한 순간도 잠시, 여린 풀꽃의 마음속은 전쟁터였다. 맏며느리로서 9식구 대가족이 불어대는 비바람에 이리저리 치이고, 교사생활에 지친 피로를 풀 틈바구니는 없었다. 쌀독이 비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쳇바퀴 도는 결혼생활은 사랑만 먹고 사는 게 아니었다. 쩍쩍 갈라지는 메마른 영혼에 단비는 내리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살아갔을까.

두 아들을 주님의 선물로 얻고 새 보금자리로 분가했다. 남편 베드로의 이상주의적 자선사업 파도는 현실을 외면한 채 실패의 물거품만 남겼다. 자신도 괴로움을 못 이겨 술이 떡이 되도록 퍼마시고 길바닥에서 업혀 들어오기 일쑤였다. 내게 무거운 등짐을 지우면서도 나의 만류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빚은 집채만큼 불어났다. 자식들에게 해주지 못한 안타까움은 산더미였다. 파란(波瀾)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어린 시절 신앙에 촉촉이 젖던 풀꽃 기도는 태풍에 휘둘려 간당간당했다다. 가슴엔 잡동사니 불순물 쓰레기 더미로 혼탁해졌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2020년 여름, 경기도 하남 구산성지, 광주 천진암성지로 순례를 떠났다. 기대 없이 따라간 순례에서 놀라운 은총의 샘물을 발견했다. 별처럼 빛나는 색깔 유리초의 꼬마 천사들이 까물까물 바람을 이기며 성모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분명 어머니께 청하는 천사들의 소리였다. 이어 배교를 강요당하는 최후의 순간, 칼 아래 스러지면서도 오직 한 곳 주님께로 조율해가는 신앙선조들을 만났다. 핏빛 순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중한 게 무엇인지 모르고 허투루 보낸 소용돌이 신앙고백에 흙탕물이 가라앉는 신비를 느꼈다.

악성 코로나의 무차별 공격으로 마스크 감옥살이는 그 끝을 알 수가 없었다. 혼란해진 몸과 마음은 기도의 향기 그윽한 성지순례를 간절히 원했다. 강력한 거리두기 시행으로 순례단도 운영을 멈추자, 헤벌어진 삶의 치맛자락을 홀쳐 여미고 홀로 ‘전국 성지순례’의 깃발을 들었다. 2021년 4월부터 서울대교구 명동대성당을 시작으로 서울 순례 도보 코스를 완주했다. 이어 의정부, 인천, 수원교구 등으로 순례의 거리와 시간을 넓혀나갔다.

경기 양평 양근성지의 순례자 미사 때였다. 신부님 강론 말씀에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여러분, 침대는 누워 잠을 자는 편안한 곳이기만 할까요? 침대는 어느 순간 자신을 화장터로 끌고 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 밤 자기 전에 침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침대’ 주제의 말씀이 이어지자, 오랫동안 봉인되었던 아픔이 툭툭 터지며 철제 침대 삐거덕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귓전을 울려댄다. 이십오 년 전 두 대 침상의 언어가 소환된다.

“아버지, 왜요? 밥 달라고요?” 철제 난간의 언어를 알아듣는 아들은 꺽꺽 울먹인다.

“조금 전에 잡쉈잖아요. 아버지 다 잡숴서 에미가 쟁반 들고 나갔잖아요. 나는 인제 밥 먹는 거예요.” 시아버지는 호랑이 눈을 치켜뜬 채, 침대를 아들 종아리 삼아 회초리 친다.

“아니라고요? 밥 안 먹었다고요? 아버지, 정말 이러지 마세요. 제발, 제발 쫌이요.”

당신도 똑같이 와상침대 신세인 아들은 눈물 말아 밥을 먹는다. 밥 안 먹었다, 빨리 밥 달라 휘몰아치며 점점 빠르고 강한 알레그로, 트레몰로로 울을 넘는 침상 언어를 동네 사람들도 다 알아들었다. 두 남자를 간병하는 나를 볼 때마다 혀를 끌끌 차며 안쓰러워했다.

1995년 봄, 기억의 창이 열린다. 남편은 경제적으로 힘든 형편임에도 무리하게 욕심을 내 자선사업을 벌였다. 부도가 나자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뇌출혈로 쓰러졌다. 몰래 나의 인감도장으로 빌린 빚은 고스란히 내게로 떨어졌고, 남편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오, 주님! 베드로를 살려 주소서! 어떤 고난도 달게 받겠사오니, 제발 살려 주소서.”

중환자실 복도에서 묵주를 움켜쥐고 겅중겅중 복도를 배회했다. 쪽쪽 말라가는 엄마를 볼 수 없었던 고교 1학년인 큰아들과 중학교 2학년인 작은아들은 수호천사가 되었다. 잠시 집에서 눈 붙이고 오라며, 하교 후 교대로 아버지를 지켰다. 새벽 화장실에서 교복을 갈아입고 등교하는 아들들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서럽게 핀 붉은 철쭉꽃 속에서 숨죽여 울었다.

병원에서 간병하는 와중에 남편 부도의 빚은 급기야 집을 경매로 넘기고 말았다. 경매 빨간딱지에 아들들은 겁을 먹었다. 소형의 아파트 경매로도 모자랐다. 나머지는 나의 월급에서 상당 부분을 압류해갔다. 순식간에 단칸방 월세로 쫓겨났다. 병원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친척과 지인들에게 자존심을 버린 채 빌린 돈의 이자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혼자서 감당키 어려운 환경에 이를 악물어도 정신은 사막의 모래바닥처럼 피폐해졌다.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경제적인 시달림,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 홀로 지쳐가는 억울함에 이혼도 불사하고 싶었다. 어쩌면 엄마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이 가슴 깊이 내장돼 있지 않았다면 도망쳤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커가는 자식들이 눈에 밟혔다. 남편이 이대로 세상을 등진다면 아빠 없는 아들들은 어찌할 것인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널 위하여 나를 주리라.”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신 주님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붙잡고 매달렸다.

주님은 베드로를 소생시켜주셨다. 몇 개 병원을 전전하는 내내 학생 훈육하는 교사처럼 속울음 삼켜가며 호되게 남편을 재활운동시켰다. 신경치료가 끝난 남편은 편마비 장애로 지팡이를 짚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장(家長)이면서 두 아들의 탄탄한 울타리임을 뼈에 새겼다.

휴, 한숨을 돌리는가 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이듬해 가을날, 이번엔 시아버님이 남편처럼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여섯 형제가 각자의 사정으로 병든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자 장남인 남편은 우리가 모셔오자고 졸라댔다. 마지막 못다 한 효도를 하고 싶어 하니, 아아, 어쩌겠는가. 병원에서 대여한 두 철제 침대는 월세 단칸방 양쪽 벽에 붙박이로 박혔다. 침대 사이 비좁은 공간을 오가며 두 남자아기의 엄마 노릇은 내 고통스러운 삶의 절정을 이루었다. 좁은 마루 한쪽 임시 골방에서, 나는 옷가지들이랑 뒤엉켜 콩나물시루처럼 웅크린 채 살았다. 입속으로 날아드는 원망과 체념의 하루살이들을 삼키며 뒤집혀진 벌레로도 밥 달라는지, 배설물인지 침대 소리에 집중해야 했다. 수시로 두 사람의 대소변 기저귀와 오물로 더럽혀진 옷가지며, 식사에 빨래에 청소에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그 시절 햇빛이 참 그리웠다.

십자가의 길에서 3번씩이나 넘어지신 주님을 기억했다. 쓰러지신 주님은 언제나 반드시 일어나셨음도 각인했다. 주님 따라 어떻게든 일어나서 두 분을 살려야 했다. 기어이 시아버지는 하얀 홑이불을 쓰고 떠나가셨다. 하루의 문을 닫아주시고 다시 열어주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은 통곡했다. 이후 침상의 언어는 들리지 않았다.

남편은 조금씩 지팡이에 의지해 걸었다. 숨 한 번 돌리려던 즈음, 큰비 오던 날이었다.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말라는 말을 잊었는지, 남편은 아파트 출입구의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다 그만 미끄러졌다. 물웅덩이 속을 몇 번이나 구르고 넘어지며 대퇴부 고관절이 으스러졌다. 인공고관절 수술을 받은 후 일어서지도 걸음을 뗄 수도 없게 되었다.

두 번째 간병이 시작되었다. 학교장이 되어 업무와 책임감이 막중한데도 밤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낮 동안 잠에 빠진 남편은 밤엔 새벽까지 TV를 보고 무언가를 쓰면서 간식을 찾으며 나의 고단한 밤잠을 앗아갔다. 업무 중에도 남편의 급하다는 전화가 쇄도했다. 학교에 미안한 채로 집에 와 보면, 방바닥을 기는 남편 옆엔 소변 통이 넘어져 뒹굴고 역한 냄새는 코를 찔렀다. 간식 나부랭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지고, 책과 필기구 등이 소변에 젖어 마치 강제피난민 구호소 같았다. 진저리치는 고통 견뎌내는 데 한계를 느꼈다.

위급할 때면 기도는 자동 응급차처럼 달려온다. “예수 마리아 요셉님이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푸시어 힘을 내게 도와주십시오!” 한두 번도 아니고 다급할 때만 하는 기도인데 주님은 언제나 들어주신다. 어떻게 때맞춰 장기요양제도와 시설 입소의 해결책이 펼쳐졌겠는가. 남편은 장애 등급을 받고 요양원 입소가 가능해졌다. 처음엔 자신을 버리기라도 하는 양 강하게 거부했지만, 요양원의 장점을 이해한 이후로 10년 넘게 생활하고 있다.

2013년 여름 끝자락, 42년 보람의 교단을 내려왔다. 시간들을 쪼개어, 동해의 해를 바라보며 파도를 벗 삼아 걷는 ‘해파랑길’ 도보순례를 홀로 다녀왔다. 지난날의 의미를 반추해보며, 퇴직 후 아픈 남편과 걸어가야 할 삶의 방향을 찾고 싶었다. 장거리 도보순례에서 나의 현실은 남과 참 많이 다름을 알게 되었다. 특히 병든 애들 아빠 대신 가장이 된 나는 절대로 아파선 안 된다는 강직한 건강 관념과 밝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뇌리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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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산에 오르고 근력 운동으로 체력을 다졌다. 기타 노래의 재능을 성당 어르신대학 강의와 레크리에이션 활동, 구치소와 복지관, 병원 환우들을 위한 노래봉사에 쏟았다. 아픔을 딛고 서서 아름답게 웃으며 사는 모습에 자식들은 물론 많은 이가 공감해주었다.

코로나 시기, 2년여에 걸쳐 가톨릭 성지를 홀로 순례했다. 전국 15개 교구의 성지 167곳에 순례 기쁨과 깨달음의 꽃 한 송이씩을 봉헌했다. 특히 강화 갑곶 순교성지의 십자가 체험에서 나에게 맞는 십자가의 크기를 알게 되었을 땐 감읍했다. 너무 무거운 십자가는 주어지지 않음도, 등짐을 지고 난 후에는 내려놓는 혜안도 터득했다. 남한산성 순교성지에서는 빙판 삶의 하산엔 기도와 신앙의 아이젠을 단단히 장착해야 함도 절실히 느꼈다.

전국 성지순례를 완주한 보상으로 감탄의 선물인 ‘축복장’을 받았다. 이듬해 부활 대축일 전 수난 미사 때의 세족례에서는 주님이 신부님을 통해 나의 발을 씻겨주셨다. 전국으로 다니며 고생스레 수고한 발과 앞으로 병든 이를 닦아드릴 내 손을 안타까이 보셨음이다.

코로나가 주춤하던 지난해 여름, 남편은 끝난 듯싶은 코로나에 덜컥 걸렸다. 전담 병원에서 강도 높은 집중치료를 받은 후 퇴원하면서 생명줄인 콧줄이 꿰어졌다. 요양원으로 복귀해선 탯줄 달린 아기인 양 유동식을 받아먹으며,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몸부림을 쳤다.

심란한 중에 치유의 은총이 가득했던 성지들을 다시 찾아 순례하며, 주님께 허허로이 내맡겼다. 투명하고 맑은 은총의 샘을 발견할 때까지 걷고 기도하며 지쳐서 엎드렸다. 피정과 묵상 중에 신기하게도 잠재되었던 선하고 의로운 용기의 분수가 한순간에 솟아올랐다.

아, 피투성이로 가시 박힌 고통에 몸부림치는 남편이 보였다. 지금껏 남편의 상처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혼자만 짊어진 삶의 무게가 버거워 남편의 곤혹과 오뇌는 외면한 채 살아왔다. 나의 고통은 남편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윽박지르며, 치매 초기 남편을 장애인으로 여기면서 무시했는지도 모른다. 자신밖에 모르고 나와 자식들 걱정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다고 얼마나 미워했던가. 그 어떤 꿈도 이루지 못하고, 병중에 한탄이 얼마나 깊었을까.

“내 탓이요.” 가슴을 쳤다. “끌어안아라, 보듬어라, 원점으로 돌아가라.” 외침의 소리, 미안함과 동시에 밀려드는 측은함과 연민, 사랑했던 시절의 연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전국으로 신앙선조 묘소 참배와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묵상하는 동안, 소진돼버린 사랑에 겨자씨만 한 누룩을 그분께서 심어주신 건 아닐까. 남편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집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게 해주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이라 생각했다. 즉시 응답하려 마음먹었다. 지금껏 내가 할 일을 요양원의 봉사자들이 대신하여 남편을 돌봐드리고 있었음을 인지했다. 인생의 마지막 열차를 탄 남편을 위하는 일에 내 모든 걸 바치고 싶었다. 삶의 아름다운 결실을 향한 도약은 고통을 껴안고 뛰어오르는 참된 신앙과 줄기찬 기도의 도움닫기이리라.

72세 고령에도 세 번째 남편의 간병은 운명처럼 또 찾아왔다.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남편 있는 요양원에서 6개월 동안 주야간으로 요양보호사 일을 했다. 남편을 직접 내 손으로 돌보진 못했지만, 아픈 어르신들을 내 남편 대하듯 섬기고 깊게 보듬을 수 있었다. 타인을 닦아드렸을 뿐인데, 내 영혼의 찌든 때가 씻겨 내려가는 신앙 체험을 맛보았다.

일이 끝날 때마다 주어지는 면회 때면, 남편은 내게서 희망을 만나는지 방긋방긋 웃었다. 촉탁의사는 나의 수고로움과 부부 면회로 회복속도가 빠르다며, 곧 콧줄을 빼고 식사도 할 수 있음을 시사해주셨다. 만남과 모임, 활동들을 접고 이곳에서 노구(老軀)를 이끄는 일의 이유가 분명해졌다. 켜켜이 눌어붙은 자만과 교만이 벗겨지며 날로 감사기도가 높아졌다.

드디어 때가 왔다. 남편이 콧줄을 빼게 됐다. 갈아서 묽은 죽을 스스로 떠먹기 시작했다. 주님께서 수난 전날 내 발을 씻기시며 하신 말씀대로 준비하고 기다린 일을 실천할 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루치아야, 내가 네게 한 것처럼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예, 나의 주님! 미소한 형제 하나에게 베푼 것이 주님께 한 것임을 기억하겠습니다.”

11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이다. 마음부터 목욕재계하고 성심으로 맞고 싶었다. 남양주 요셉수도원으로 피정을 떠났다. 긴 세월 무거운 십자가를 내게 떠넘긴 남편에 대한 미움과 원망들을 털어내고, 원로 신부님께 면담을 통한 고해성사로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

남편이 들어올 자리가 없게 꽉 차 있었던 나의 취미와 봉사활동 모두를 단수 단전하듯 끊어냈다. 엄마가 힘들어 쓰러질까 봐 아버지 영입을 반대하던 두 아들도 마침내 진심을 알고, 헌 집을 고쳐 새 집 만들기에 힘을 보태주었다. 소장하던 서적과 앨범, 음악자료와 활동 추억들, 옷가지와 살림살이 일부를 버렸다. 이젠 남편을 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새로 단장한 집에서 보고픈 사람들을 만나는 남편은 천국의 아이처럼 웃음이 해맑다. 대여해온 침대 곁엔 자비의 예수님이 팔 벌려주시고 성모님은 두 손 모아 미소로 지켜주신다. 하얀 우리 집이 작은 성당 공소 같다며 눈물 글썽이는 남편을 이제야 가슴으로 안아드린다. 주님의 자비와 성모님 향기 가득한 우리 집엔 성당의 신부님도 매달 병자방문을 와주신다. 집 곳곳을 축성해 주시고, 은총 샘물에 젖는 강론 말씀과 봉성체로 새 힘을 주고 가신다.

참새처럼 오늘이 몇 월 며칠 무슨 요일이고, 큰 애랑 작은 애랑 손자가 저녁 먹으러 온다 하면 베드로는 벌써 빨간 풍선이 된다. TV 함께 보며 말벗 해드리면 하늘 웃음꽃이 방안 가득 피어난다. 내가 무엇이기에 주님은 그토록 걱정을 하시고, 이토록 은총을 베푸시는 걸까.

“여보! 나 기저귀 갈아줘요. 아이고, 갑갑해 죽겠네.”

타이밍을 조금만 놓치면 된장 종지 한가득 역한, 그러나 향긋한 배설물을 퍼질러놓는다.

“알았어요. 내가 닦아드릴게요. 당신은 못 말리는 똥싸개!”

“내가 좀 많이 먹어야지. 대충 좀 하지, 왜 번번이 죽을 그렇게 맛있게 해주는 거야?” 수차례 강산이 바뀌었다. 여린 풀꽃의 기도는 흔들릴지언정 꺾이지 않았다. 일흔과 여든을 넘겨 찾아온 단 하나의 노을빛 사랑은 찬연했던 지난 열정을 사르며 손을 맞잡는다.

“십자가에 주님과 당신이 포개어지던 첫 만남처럼, 당신은 영원한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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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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