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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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청년대회 마치고 한국 방문한 프랑스 청년들 … “한국교회 신심에 깊은 감명”

“선조들의 신앙 발자취 따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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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27일 서울 독산1동본당 신자들과 함께 견진성사를 받은 프랑스 청년 10명과 방문단이 견진성사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일주일간 신자 가정서 생활
절두산·갈매못 성지 등 순례
방문단 10명 견진성사 받아

“우리선조들이 한국에 심어놓은 신앙 씨앗을 보러왔습니다.”

19세기 조선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고국을 떠났던 프랑스 선교사들. 180여 년이 지난 2008년 7월 그 후손들이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6개월 전부터 한국방문을 준비한 생 드니 지역 청년 120여명은 서울대교구 독산1동본당 신자들 가정에서 7월 21일부터 일주일간 생활했다. 청년들은 도착과 함께 성당이 위치한 구로공단 지역을 관광하며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아갔다. 지역관광을 통해 생전 처음으로 찜질방이라는 곳을 가본 청년들은 너무도 다른 문화에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단지 서로 다른 문화뿐 만은 아니었다. 24일과 25일 양일간 갈매못 성지, 절두산 성지 등 천주교 성지를 순례하며 한국교회의 신앙을 접하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청년들은 절두산 성당을 가득 채운 신자들과 그들이 부른 감미로운 성가가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해 봤다는 메리베스(20)씨는 “세계청년대회 때는 마냥 신나고 즐거웠는데 한국에 와서 열심히 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적으로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27일 생 드니 교구장 올리비에 드 베랑제 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에서는 독산1동 본당 신자는 물론 프랑스 청년 10명이 함께 견진성사를 받기도 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 청년들은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23차 세계청년대회에 참가했던 청년들이다. 독산1동본당에 머문 청년들 외에도 문정동본당(주임 김홍진 신부)에 노르망디 지역 청년 106명, 하비에르국제학교에 릴르, 르왕교구 소속 청년 40여 명이 방문하기도 했다. 이들은 각 본당과 단체가 마련한 일정에 따라 약 일주일 간 한국에 머물다가 프랑스로 돌아갔다.


◎5년만에 방한한 생 드니 교구장 올리비에 드 베랑제 주교

“한국 신자들 따뜻한 사랑 변함 없어”

“한국을 떠난 지 15년이 지났는데 신자들의 따뜻한 사랑은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교회에 프라도회를 세우고 지난 1993년 프랑스로 돌아간 올리비에 드 베랑제(한국명 오영진) 주교. 15년 만에 프랑스 생 드니교구 청년들과 함께 한국을 찾은 그를 7월 25일 절두산 성지에서 만났다.

오랜만의 방문이었지만 그의 한국어 실력은 굉장히 유창했다. 프랑스로 돌아간 이후에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잊지 않기 위해 성무일도와 독서 등을 한국어로 받친 덕분이라고 했다.

“종종 한국 신부님들과 신자들을 통해 한국 소식을 듣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와서 오랜만에 김수환 추기경도 만나고 참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현재 생 드니교구 교구장을 맡고 있는 그는 이번 방문을 6개월 전부터 준비했다고 전했다.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 청년들이 주교를 직접 찾아와 한국방문을 제안한 것.

“저는 흔쾌히 수락했죠. 청년들이 먼저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고 제안을 해 와서 기뻤습니다.”

짧은 일정으로 인해 프랑스 청년들에게 한국교회를 전부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아쉽다는 그는 “청년들이 한국방문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재를 살아가며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올리비에 주교는 서울 독산1동본당이 마련한 일정을 마치고 지난 7월 30일 프랑스 생 드니로 출국했다.

◎한국교회와 프랑스교회의 인연

선교사 열정·순교로 한국교회 초석 마련
성소 발굴·대목구 분할 앞장
한국교회 동반자로 자리매김

한국과 프랑스교회 인연의 핵심은 ‘선교사’로 요약된다. 특히 지난 6월 설립 350주년을 맞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교회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노력과 순교를 통한 두 교회의 인연을 알아본다.

▧ 조선포교지에서 대목구로 독립

1827년 조선 신자들의 서한을 받은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은 북경교구에 위임되다시피 했던 조선 포교지의 독립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다. 그 후 예수회 신학교 총장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에게 서한을 보내 의중을 타진했지만 두 수도회 모두 여건을 이유로 주저했다.

이때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 포교지의 상황을 알게 됐다. 그는 1829년 서한을 통해 가능한 빨리 지원자를 선발해 조선으로 파견하되 지원자가 없다면 자신이 조선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1831년 7월 열린 추기경 회의에서는 조선 포교지를 ‘조선대목구’로 설정하는 동시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한다고 결정하게 된 것이다.

▧ 프랑스 선교사들의 성소 발굴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수많은 고난을 겪어야했다. 1834년 그는 처음으로 조선 신자들의 서한을 받고 중국 마가자라고 불리는 서부 달단의 한 교우촌에 도착, 요동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의 과로로 인해 얻은 병 때문에 10월 20일 선종한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이후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가 차례대로 입국한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어를 배운 후 교우촌을 순방하며 성사를 집전하고 이 때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해 마카오로 보내는 등 성소발굴에 최선을 다한다.

이후 김대건 신부는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서품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귀국하게 된다.

▧ 박해와 순교, 대목구 분할

하지만 한국교회의 첫 번째 사제 김대건 신부는 1846년 병오박해로 순교했고 그의 순교를 전후해 1839년에는 3명, 1866년에는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도 순교했다.

베르뇌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했고 제5대 조선 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도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것이다. 이들 중 3명의 주교를 포함한 10명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들과 함께 시성됐다.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된 후 프랑스 선교사들은 사목활동을 넓혀간다. 원주 고을에 있던 부엉골 신학교를 1887년 서울 용산으로 옮겨 대·소신학교로 완전히 정착시키고 1900년까지 11명의 신부를 배출한다.

1831년 조선 대목구 설정 이후 1911년까지 80년간 교세가 크게 확장되자 제8대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조선대목구의 분할을 요청한다. 따라서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이름을 변경하고, 대구대목구, 원산대목구, 평양지목구, 광주지목구, 춘천지목구 등이 생겨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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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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