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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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과 천주교 신앙

배교 후 속죄의 삶 살며 굳건히 신앙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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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가계도
 
▲ 수원성 방화수류정 서쪽 벽면의 십자형 문양.
 
▲ 십자가는 경기도 광주 마재 밭에서 발굴된 성물이라 전하는데, 발굴 당시 항아리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배교 후 속죄의 삶 살며 굳건히 신앙 지켜

1784년 이승훈에게 ‘요한’ 세례명으로 영세
천주교 믿는다는 이유로 18년간 유배

강진군, ‘다산가와 천주교’ 주제 유물전1784
묵주, 십자가 등 신자 증명하는 유물 전시

전남 강진군 다산기념관의 이번 전시회를 통해 다산가(茶山家)와 천주교가 함께 재조명됨에 따라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에 대한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됐던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논란과 함께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 전시회의 의의, 다산가와 천주교의 상관관계에 대해 알아본다.

▧ 다산 정약용과 천주교

강진군 다산기념관은 보도자료를 통해 “다산 가계는 한국천주교사 뿐 아니라 세계 가톨릭사 안에서도 보기 드문 집안”이라며 “다산은 1784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세례명은 요한”이라고 말했다.

2005년부터 강진에서 해마다 열리는 ‘다산 정약용선생 유물특별전’이 4회를 맞아 ‘다산가와 천주교’라는 주제를 꼽을 만큼 정약용의 가계는 천주교와 연관성이 깊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는 정약용이 신자였음을 증명하는 묵주와 심자가, 성패 등 다양한 다산가의 유물들도 전시됐다.

다산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에 대한 연구는 유학자와 교회사학자 사이에서 첨예한 시각차를 보이며 꾸준히 지속돼왔다. 우선 ‘다산 정약용은 심약한 배교자였으나 회개하고 보속하다가 천주교 신앙인으로 선종했다’는 논란이다.

다산은 1784년 큰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에게서 처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자신이 천주교에 입교한 계기를 ‘선중씨묘지명’에서 밝히고 있다.

“천지가 창조되는 시원이나 신체와 영혼 또는 삶과 죽음의 이치에 관하여 들으니 놀랍고 의아하여 마치 은하수가 무한한 것과 같았다. 서울에 돌아오자 이벽을 따라가 ‘천주실의’와 ‘칠극’ 등 몇 권의 책을 보고 비로소 기뻐하여 마음이 기울어졌다.”

하지만 정약용은 천주교 신앙을 믿는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강한 비판과 견제를 받아 여러 고초를 겪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배교한 증거를 확고하게 제시했지만 죽음을 면하고 경상도 장기로 유배됐다. 그해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다시 심문을 받았고 결국 전라도 강진에 유배돼 40세부터 57세까지 18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 천주교 신앙 논란

정약용의 신앙에 대한 학자들의 논란도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김학열 신부(수원교구 용인대리구장)는 “병인년(1806) 강준흠의 상소와 무자년(1828) 예부좌랑 윤극배의 상소 모두 정약용을 천주교 신자로 규정한다”며 “정약용은 박해상황에서 가문의 보존을 위해 모든 사실을 명쾌하게 기록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한 달레 신부는 정약용에 대해 귀양이 풀려 돌아온 뒤 그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모든 교회 본분을 지키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입으로 배반한 것을 진심으로 뉘우쳐 세상과 떨어져 살며, 거의 언제나 방에 들어앉아 몇몇 친구들 밖에는 만나지 않았다. 그는 자주 대재(大齋, 단식재의 전 용어)를 지키고 여러 가지 극기를 행하며 몹시 아픈 쇠사슬 허리띠를 만들어 띠고 한 번도 그것을 끌러 놓지 않았다.”

또 “정요한은 1835년 유방제 빠치피꼬 신부가 조선에 들어온 뒤, 그의 손으로 마지막 성사를 받은 후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에 대한 증거는 ‘천진암’과도 연결돼있다. 강학이 열렸던 천진암에 들러 자신의 추억을 생각하고 1827년 65세의 나이에는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로 난 이 오솔길은, 내가 어린 아이 적에 오르내리며 놀던 길인데, 이제 지금 천진암에 다시 와보는 이 나그네의 마음은 서글퍼지네…’라고 노래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유배 후 정약용이 거처했던 ▲고향 마재 집터에서 발견된 묵주, 십자가, 성패, 성모상 등과 ▲1796년 축조된 수원성(화성) 방화수류정 서쪽 벽면의 십자형 문양이 정약용의 신앙이 바탕이 됐다는 주장 등 다산과 천주교의 상관관계를 뜻하는 다양한 증거들이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 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최석우 몬시뇰

“교회사 발굴, 육성에 꾸준한 관심을”

“다산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임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점점 다산과 천주교의 관계가 잊혀져가는 상황에서 ‘다산가와 천주교’를 재조명하는 전시회는 의미 있는 자리지요.”

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최석우 몬시뇰은 비록 이번 전시회가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를 명쾌히 밝힐 수는 없으나 교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신유박해 때 배교를 한 것은 인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라는 거지요. 다산은 배교를 뉘우치고 환갑 때부터 마음을 새롭게 바로 잡았어요.”

그는 바오로 성인과 같이 다산 정약용은 ‘회심’을 했다고 말했다. 환갑을 맞으며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또 이러한 교회사와 다산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신학을 함께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다산 정약용에 대한 성물이나 책 등이 예전에는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교회에서 관심을 갖지 않고, 흐지부지 되다보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것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는 현재 가지고 있는 정약용에 관한 교회 내 자료의 한계와 점차적으로 사라져가는 관심에 대한 안타까움도 표현했다.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활발한 연구를 계속해야 합니다. 배교는 했지만 곧 후회하고, 나중에는 고행까지 행하며 열심한 신자로서 자신의 신앙을 지켰던 다산을 생각하며 말이지요.”

사진설명
▲정약용 가계도
▲수원성 방화수류정 서쪽 벽면의 십자형 문양.
▲십자가는 경기도 광주 마재 밭에서 발굴된 성물이라 전하는데, 발굴 당시 항아리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오혜민 기자 gotcha@catholictim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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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8-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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