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밤늦은 시간에 택시를 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분이 저를 흘깃흘깃 쳐다보십니다.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별일 아니겠지’ 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기사분이 제게 묻습니다.
“혹시 신부님 아니십니까?”
밤늦은 시간이고 또 사복을 입었기 때문에 제가 신부라는 사실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묻자 “신부님을 텔레비전에서 보았습니다. 너무 내용이 좋아서 신부님이 나오는 방송을 다 다운받아서 봤어요. 조금 전에도 스마트폰에 담아서 보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제 택시에 타신 것입니다. 영상으로만 볼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직접 뵈니 정말로 신기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제가 한 가지 질문을 좀 드려도 될까요? 제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의문인데,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간단한 질문이지만 답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질문 자체가 막연하고, 여러 질문을 함께 묶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것인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세상에 왜 있는가?’ 등의 질문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대답해도 답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떻게 대답해도 모두 틀릴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질문은 누가 답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대답을 찾아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는 요한의 말을 들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쫓아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고 물으시지요.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와서 보아라”(요한 1,39)였습니다.
우선 이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부귀영화를 얻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생에서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즉, 가장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인생의 목적을 찾을 수 있을지를 얻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를 시시콜콜히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하신 말씀은 “와서 보아라”(요한 1,39)였습니다.
언젠가 어떤 형제님께서 “신부님, 저 세례 받은 것 취소시켜 주세요”라는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여쭤보니 세례받은 뒤에 잘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당에 다니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서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산다고 했는데,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도 없고 또 기도도 했는데 전혀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하느님과 저랑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시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하시면서 직접 보고서 판단하라는 것처럼, 우리들의 행동을 먼저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길, 그러나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시길 끊임없이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제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했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
하느님께서 주실 것을 먼저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지금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 하느님 뜻에 맞게 살면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 예언자가 부르심에 응답했던 모습을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