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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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4) 제1차 콘스탄티노플로스 공의회(상)

다시 분열된 교회, 일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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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개최된 성 이레네 성당.
장방형 십자가 형태의 이레네 성당은 4세기 초까지 아프로디테의 신전이었다가 성당으로 개조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둘러싼 논쟁은 일단락되는 듯 싶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어찌된 일인지 자신이 내쫓았던 아리우스파 주교들을 3년 만인 328년에 다시 측근으로 불러들입니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니코메디우스 주교 에우세비우스입니다.

아리우스와 친구였던 에우세비우스 주교는 성자종속설 경향에 기울어져 있던 동방 주교들의 세를 규합해 정통파인 니케아 신경의 옹호자들에게 맞섭니다. 335년 티루스 시노드, 340년 로마 시노드, 341년 안티오키아 시노드와 로마 시노드 등 교회회의들이 잇달아 열리고 친아리우스파와 정통파가 서로 물고 물리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여기에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망은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하지요. 제국의 동방은 니케아 공의회 선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주교들을 지지하는 콘스탄티우스가, 정통파 주교들이 주로 있는 서방은 콘스탄스가 각각 다스리게 됩니다. 교리상의 분열이 정치적 분열과 겹쳐져 대립이 심화됩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로마 주교인 교황 율리오 1세는 동방과 서방 주교들이 함께 참석하는 공의회를 사르디카(오늘날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합니다. 342년 혹은 343년에 소집된 사르디카 공의회에는 대략 서방에서 90명의 주교가 동방에서는 80명의 주교가 참석합니다. 하지만 공의회는 참석 주교들의 자격 문제로 삐그덕거리더니 동방 주교들이 불참을 선언하고 맙니다.

반쪽이 된 사르디카 공의회에서 서방 주교들은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면서 동방 주교들이 이전에 단죄한 아타나시오 주교를 복권시킵니다. 아타나시오는 니케아 공의회 때 정통파를 이끈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데르 주교 밑에서 부제로 있으면서 정통파가 승리하는 데 기여한 인물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대주교가 된 후 아리우스파 등 반대파들에 밀려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정통신앙을 끝까지 수호한 성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토대인 `아타나시오 신경` 저자이기도 합니다.

한편 동방에서는 성자가 성부에 비해 열등하다는 급진적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니케아 공의회의 선언에 따라 배격하지만 동시에 성자와 성부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니케아 공의회 표현도 반대하는 다른 표현 양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성자는 성부와 같은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으로서 본질이 같지 않고 유사하다는 `유사본질`설이 그것입니다. 이 주장을 반(半)아리우스주의(Semi-Arianism)라고 부릅니다. 아리우스 주장을 절반쯤 따른다는 뜻이지요. 이제 성자의 신성을 둘러싼 논쟁은 동일본질(니케아 정통파), 유사본질(반아리우스파), 성자종속(아리우스파)로 삼분됩니다.

◇리미니-셀레우키아 공의회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세를 규합한 유사본질파 주교들은 제국의 황제 플라비우스 율리우스에게 압력을 가해 다시 한 번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359년 두 곳에서 회의가 열립니다. 서방에서는 이탈리아 리미니, 동방에서는 오늘날 이라크 땅인 셀레우키아에서지요. 리미니에 모인 서방 주교들은 400명이 넘었고, 셀레우키아에 모인 동방 주교들 또한 약 150명이나 됐습니다. 참석자 수로만 본다면 가장 규모가 큰 공의회였습니다.

유사본질파 주교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공의회에서 관철될 수 있으리라고 희망을 품지만 황제는 오히려 또 다른 안을 제안합니다. `성자는 성경에 따라 성부와 유사하다`는 정식(定式)을 주교들에게 합의의 초안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을 전거로 내세우며 두루뭉실한 표현으로 합의에 이르도록 한 것입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단지 제안만 한 것이 아니라 이 안을 따르도록 강요합니다. 교리의 통일도 중요하지만 교리 일치를 통한 주교들의 화해가 또한 제국 질서 유지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황제는 압력을 행사해 리미니와 셀레우키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 550명 전원의 서명을 받아내고는 360년 1월 1일에 제국에서 마침내 교회 평화가 회복됐다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부와 성자의 신성을 둘러싼 논란은 이제 네 파로 나뉘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니케아파(정통파), 유사본질파(반아리우스파), 유사파(리미니-셀레우키아 공의회 지지파), 그리고 엄격한 아리우스파로.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성령피조설파
한편 3세기 중엽 소아시아 오늘날 터키 고원지대인 카파도키아에는 유명한 교부(敎父, 고대와 중세의 저명한 교회 학자를 `교부`라고 부름) 삼총사가 있었습니다. 카이사리아의 주교 바실리오(329/331~379), 나지안즈의 주교 그레고리오(329/339~389/390) 그리고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오(335/340~394/395)였습니다. 이들에게서 성부와 성자의 신성을 둘러싼 논란을 해소할 수 있는 핵심 개념들이 다듬어져 나왔는데, 본성(본질 또는 본체)과 위격의 구별이 그것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신적 본성 또는 본질이 같지만 위격으로 서로 구별된다는 것이지요.

이와 함께 삼위일체의 성령에 관한 문제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성령을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설(異說)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른바 성령피조설파(Pneumatomachi)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채택한 신경에 "또한 성령을 믿나이다"라고만 돼 있어서 성령과 성부 및 성자와의 관계가 확실치 않은데다 아리우스파가 성령 또한 성자와 마찬가지로 피조물로 이해한 것 등이 성령피조설파가 생겨난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령피조설파는 마케도니우스파(Macedoniani)라고도 부릅니다. 이 설을 내세우는 이들이 360년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였던 마케도니우스의 추종자들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마케도니우스가 정말로 성령피조설을 내세웠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379년 테오도시우스가 로마제국 황제가 됩니다. 훗날인 392년에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유일한 합법적 종교로 선포하게 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 교리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교회가 분열에서 벗어나 일치를 이루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집된 공의회가 381년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최된 두 번째 세계 공의회인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입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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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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